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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Aug 31. 2024

말론 죽다의 무의미에 대하여

사뮈엘 베케트의 말론 죽다를 읽고

  사뮈엘 베케트에 대하여

  EVER TREID. EVER FAILED. NO MATE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사뮈엘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에 있는 구절이다. 베케트는 왜 그토록 실패를 반복하고자 했으며, 더 잘 실패하고자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간략하게 당대 철학, 문학 사조를 살펴보자. 20세기에는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는 모더니즘. 그리고 새로운 질서 또한 결국은 기존의 질서처럼 한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모더니즘으로부터 이어지는 전체주의 질서와 정형화된 통일성을 거부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맞았다.

  당대 프랑스 지성인들도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고, 언어 외적인 것에 대해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인상, 경험 등이 문학 작품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그의 3부작이 대표적인 예이다.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자>의 3부작에서 베케트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존 문학 작품의 모든 틀을 깨버린다. 작품과 독립적인 작가의 위치가 붕괴되며, 서술은 서사가 없고, 모든 구절은 무의미한 그러한 작품을 통해 베케트의 허무주의는 우리에게 ‘무의미’를 전달한다.



말론 죽다의 줄거리

  말론 죽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 말론은 어디인지,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방 안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말론은 상상을 통해 사포, 루이, 맥먼, 몰, 르뮈엘과 같은 인물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있던 일인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말론은 이 이야기를 놀이로 여기며 상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말론의 상상은 문장단위로 번복되고,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인물의 이름을 바꿔버리는 등 정신 분열에 가까운 서술을 한다. 그러다 작중 인물을 자신과 혼동하고, 따분함을 느끼고 마지막에는 르뮈엘을 통해 상상 속 인물을 모두 죽여버리려는 시도를 하지만, 죽은 것인지, 죽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무의미함

  말론 죽다의 모든 서술은 번복된다. 말론은 사실 말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몰로이>에 등장하는 몰로이일 수도, 모랑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수많은 무의미 속에서 그가 글을 쓰는 과정이다.

  그가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한 무의미 속을 표류했을 것이지만, 작품 속 유일한 서사의 핵심인 상상과 글쓰기는 무의미를 창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구토>의 마지막 장에서 글을 매개로, 예술을 매개로 기억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카뮈는 사랑과 기억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 <페스트>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말론의 상상도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죽음 앞에서의 기억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또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말론이 상상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가능성을 바탕으로 추측만 할 뿐이기에 모든 추측은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무의미하다.


  그리고 작품의 핵심인 글쓰기와 상상의 무의미는 더욱 확장되어 독자를 압도한다. 시간의 무의미, 인물의 무의미, 그리고 서사의 무의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시공간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며, 이 점으로 인해 서사 진행에 중대한 차별점을 가져온다. 게다가 어쩌면 또 다른 말론의 인격 혹은 말론의 과거였을지도 모르는 상상 속 인물에 대해 고민하다가도 한순간에 죽여버리고, 그 사실을 다시 모호하게 만드는 서술 방식은 인물의 무의미를 강조함과 동시에, 소설 작품의 서사자체에 무의미를 부여한다.



말론은 죽었을까? 혹은 죽을까?

  나는 <말론 죽다>라는 제목의 번역이 살짝 아쉽게 느껴진다. Malone Meurt라는 제목 속 Meurt는 죽음이라는 명사보다도 죽어가다, 시들다라는 과정상의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론이 죽음을 향해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케트가 무의미를 의도하였다면, 단순히 작품의 무의미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누군가에게는 빵 한 조각이자,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 있는 ‘고도’를 다룬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고도와 기다림의 과정은 모두 작품 속의 표면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론에게는 부차적인 것을 넘어 삶과 죽음마저 무의미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의미해지고 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자>라는 제목을 통해 언어가 무의미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는 글쓰기와 상상의 종말을 예고한다. 만약 이것만으로 삶이 끝난다면, <말론 죽다>에서 작품이 완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무엇보다 가장 필수적이며, 중요한 언어의 종말 이후에도 말론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글쓰기와 상상이,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기억이 베케트가 의도한 전부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말론은 살아가면서, 죽어가고 있으며, 그에게는 오로지 삶과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듦. 즉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만이 남아있다. 그는 몰로이, 모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고, 또 말론, 사포, 맥먼으로써 살았으며, 앞으로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살아갈 것이다. 이 모두는 하나이며, 그렇기에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인간의 죽음은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잠에서 깨는 것, 인간의 탄생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한 것이 매우 절묘하게 베케트의 3부작에 투영된다. 이 둘의 유일한 차이라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을 바탕으로 삶의 영속성을 해석하였고, 베케트는 형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대로 내버려 두며 경험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보다 베케트의 3부작이 인기가 시들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피하거나 혹은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 시도하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언급한 부조리 철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베케트는 한계가 분명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학을 통해 실패하고, 실패하며, 더 잘 실패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를 문학 작품으로서 온전히 경험하게 해주는 것을 통해 왜 베케트가 부조리극의 대가이며, 실존주의자로 평가받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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