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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04. 2024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대한 깊은 사색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고

  지하생활자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설명하는 1부와 15년 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지하생활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기에 내용은 극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평범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난해하여서 왜 그럴까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한다. 이번 글은 지하생활자와 그의 수기에 대해 깊게 다루어보려 한다.



1. 이성과 부조리

  1부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의 ‘번복’이다. 마치 베케트의 <말론 죽다>처럼 이 책의 서술자인 지하생활자도 자신의 한 말을 계속 번복한다. 그것에 대해 단순히 정신적 문제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부조리에 놓인 화자들을 모두 정신 분열로 바라볼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문학의 의미를 격하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반복된 번복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한평생 무엇 한 가지 시작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5장), “여러분, 맹세하고 말하거니와 나는 지금 내 손으로 쓴 것을 한마디도, 단 한마디도 믿지 않고 있다!”(11장)라는 구절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무언가를 믿거나, 확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1부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바로 ‘이성’이다. 이성주의자와 합리주의자들은 온전한 결과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수학적 공식처럼 이해하려고 한다. 이는 특정한 행동을 하면, 특정한 심리 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마치 2x2=4와 같은 수학적 공식으로, 일종의 통계표를 이용한 분석으로 인간을 파악하려는 세계의 학자들을 비판하는 지하생활자의 태도를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은 그들의 생각처럼 행동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수기의 형식에 대해선 그 어떤 구속도 받고 싶지 않다. 순서니 체계니 하는 것도 나에겐 아랑곳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써나갈 뿐이다.“(11장)라며 합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서술을 이어나간다.

  당대의 실천 지식인들이 세계라는 돌 벽을 자신의 이론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그들은 스스로의 도전을 포기하거나, 그저 자연의 뜻(운명)으로 여기며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지하생활자는 결코 돌 벽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물론 어느 길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것이라 말하는 지하생활자의 모습에서 마치 카뮈의 부조리철학이 문득 떠올랐다.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에는 “시시프스는 웃고 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처럼, 넘을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돌 벽에 대해 끝없는 시도를 하는 것이 결코 세계가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슬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그렇기에 지하생활자는 2부 10장에서 “값싼 행복과 고결한 고민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좋을까?”라고 독자에게 묻는 대목을 통해 그는 자신이 수기를 쓰는 행위(즉, 부조리와 맞서는 행위이자, 부조리에 포기한 이성주의 학자들에게 반례가 되어주는 행위)를 고귀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그는 당대 이성주의 학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무위’를 담는 수기를 계속해서 쓰면서 스스로 그들의 반례가 되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의 시선에서는 병든 인간이자, 타락한 것이고, 더러운 생쥐처럼 보이겠으나, 그것은 그저 배부른 돼지의 시각일 뿐이며, 본인은 그들이 실패한 세계의 부조리에 끝없이 나아간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유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대단한 의지를 지닌 존재이며, 계속해서 마음이 쓰이고 응원하고 싶은 존재로 보이겠지만, 이성에 젖은 이들에게는 혹은 그러한 생각조차 없었던 이들에게는 정신분열자 내지 추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2. 부조리와 인간의 삶

내가 정리한 지하생활자의 수기

  위 도식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한 책의 내용이다. 대부분의 내용을 1에서 설명하였으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삶의 과도기’라는 표현을 아직 설명하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부조리는 거창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지극히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적어도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저마다 느낀 세상의 모순이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고민을 지속하다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쉽사리 꺼내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지하세계 속에서 그러한 고민을 이어간다. 암울한 세계처럼 느껴지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수행길,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가 섬으로 들어가 예술활동에 전념한 것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은 “고민하는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이다. 고민을 통해 필연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있으며, 이미 잘하고 있었음을 느끼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삶에 있어 하나의 큰 전환기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나를, 타인을, 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시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철학과 문학의 역할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전후로 구분될 정도로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크의 과도기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도 인간에 대해,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해 지하생활자와 비슷한 돌 벽의 경험을 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문제는 그 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쨌든 어딘가로든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삶에 대해, 부조리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어디론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길이 곧 우리에게 정답은 아니기에 우리 앞에 놓인 길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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