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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Sep 29. 2024

내 인생의 첫 번째 철학 선생님, 햄스터 하양이

동물도 죽어서 천국에 가나요?

 난 어릴 때부터 동물을 참 좋아했다. 동물을 키우고, 동물과 교감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유대를 쌓아가는 것이 퍽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부모님께 조르기 일쑤였다. 특히나 집 근처 홈플러스를 가면 항상 약속이라도 한 듯이 2층 애완동물 코너 앞에 주저앉아 햄스터나 토끼를 보고 “우리도 한 마리 키우면 안 돼?”하며 졸랐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딸의 필사적인 애교(?)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NO’를 외쳤다. 특히 어머니는 유독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격하게 반대하셨다. 왜냐하면, 키우던 동물이 죽을 때마다 내가 너무 심하게 울어대기 때문이다. 나는 햄스터 한 마리가 죽어도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하루 종일 엉엉 울어서 불어 터진 얼굴로 돌아다니니 어머니 눈에도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내가 동물을 키우자고 보채면 “또 시작이다!”라며 단호하게 반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동물을 키우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동물의 죽음은 물론 슬프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동물이 주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그랬던 걸까? 아무튼 나는 동물을 키우고, 웃고, 죽으면 또 눈물을 펑펑 쏟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그런 식으로 내 곁을 떠난 동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동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키웠던 햄스터 ‘하양이’였다. 새하얀 정글햄스터였던 하양이는 내가 키운 햄스터 중에서도 꽤 오래 살았던 편이다. 그렇게 정이 많이 든 탓일까? 하양이가 죽었을 때는 유독 더 요란하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진절머리를 내고, 아버지가 날 달래기 위해 “같이 무덤을 만들어주자”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집 앞 화단에 하양이를 묻은 뒤 두꺼비집 같은 봉긋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까지 꽂아줬으니 나름 구색을 갖춘 무덤이었다. 나는 무덤 앞에서 훌쩍거리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있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하양이를 만날 수 있어?”

“물론 만날 수 있지.”


 그 말에 조금 위안을 얻은 나는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동물들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못 가. 걔들은 영혼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죽어서도 못 만나지.”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어머니의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하양이는 호불호도 분명히 있었고 감정도 느꼈다. 아침저녁에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열심히 쳇바퀴를 돌렸고, 내가 손을 내밀면 조심조심 손바닥 위로 올라탈 때도 있었다. 그런 하양이에게 영혼이 없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양이에게는 이번 생이 끝이라는 사실이, 사후세계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펐다. 그래서 나는 그날 부로 “동물에게는 영혼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 살았다.


 정말로 인간만 영혼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동물이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정은 영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느끼는 걸까?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는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등등,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면 거기서 파생된 수많은 하위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성경을 뒤져봐도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동물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말도 없었다. 아무리 동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구석구석 찾아보고 설교를 열심히 들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도저히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목사님인지, 학교 선생님인지 여하튼 어떤 어른에게 내가 가진 의문을 토로했다. 정말로 동물에게 영혼이 없냐고,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반쯤 투덜거리며 털어내자 그 사람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어려운 질문을 생각하는구나? 넌 철학자가 딱이겠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어깨가 조금 으쓱했다. 철학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잘 몰라도 일단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던 탓이다. 그리고 동시에 철학을 공부하면 이 의문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철학에 흥미가 생겼다. 말하자면 하양이의 죽음이 내게 철학이라는 선택지를 던져준 셈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하양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질문에 답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할수록 상대방에게 영혼이 ‘생기는’ 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것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대방이 감정을 느낀다고 믿고 그것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은 반쯤 만들어진 셈이다.


 성경에는 천지창조를 끝마친 신이 인간에게 숨, 즉 영혼을 불어넣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에서는 인간에게만 특별히 숨을 불어넣고, 그들의 모습을 신과 닮게 만든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신이 인간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숨을 불어넣었고, 자신과 닮은 존재로 여겼다. 나는 이 구절 속에 궁극적인 공감과 존중의 원리, 즉 사랑의 원리가 담겨 있다고 느꼈다. 신은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를 가리켜 신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인 ‘혼’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하양이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움직이는 장난감으로 취급했다면 하양이의 죽음을 슬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하양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하양이가 좋아하는 간식이 무엇인지 궁리할 필요도, 하양이의 집이 추운지 더운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모든 고민들은 내가 하양이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양이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역시, 하양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영혼이 생기는 것, 혹은 적어도 상대방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은 내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나의 주장(?)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양이는 마치 과제를 마구마구 쏟아내는 교수님처럼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떠났고, 그 의문들은 내 마음속에 확실히 뿌리내려서 아직도 틈만 나면 나에게 속살거린다.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해?”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한다.


“글쎄? 어제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달라.”


 이 의문이 남아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철학을 이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의문을 생각하는 한 하양이는 항상 내 마음속에 기억될 것이다. 그러니 하양이가 저 세상에 돌아갈 곳이 없다면 내 마음이 하양이의 집이 되면 된다. 거기서도 하양이는 끊임없이 생각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면서 내게 질문을 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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