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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Oct 01. 2024

사랑을 노래한 90세 철학자

홉스: 나이 구십이어도 연애시는 쓸 수 있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수많은 철학자들을 접해왔지만, 그 중에는 눈에 띄게 독특한 일화를 가진 철학자들도 있었다. 결혼해야 할 이유를 10년이나 검토한 끝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칸트, 길을 가다가 말馬이 자기 논문을 읽고 있다고 착각해 깜짝 놀랐다는 데카르트 등등, 그들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천재와 괴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 여실하게 느낀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철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토마스 홉스일 것이다. 


Thomas Hobbes. 잉글랜드의 철학자. 사회계약론과 저서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하다


 사회계약론과 저서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철학자 홉스는 출생부터 남다르다. 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호시탐탐 잉글랜드를 노리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무적함대가 몰려온다는 소문에 놀라 7개월만에 홉스를 조산했다. 그는 종종 이 일화를 인용하면서 “나는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다녔다.


 과연 공포와 함께 태어난 사람답게(?)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마을 목사였던 아버지는 사실상 ‘먹사’나 다름없어서 사고만 치고 다니다가 결국 아내와 아들을 내버려둔 채 야반도주를 했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다행히 총명한 홉스를 눈여겨본 삼촌이 학비를 지원해주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한들 중하류층 출신의 학자 나부랭이가 먹고 살기에는 너무도 막막한 현실이다. 당시 지식인 계층은 상류층 후원자를 얻어서 그 집의 전속 가정교사로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밥벌이였으니까. 


 거기다 잉글랜드 내부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계속되는 에스파냐의 전쟁 위협, 청교도 혁명으로 인한 내전의 위협… 결국 홉스는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를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프랑스 망명길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홉스를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준 저서 <리바이어던>은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계에서도, 종교계에서도 공공의 적이 된다. 결국 <리바이어던>은 금서로 지정되고 그는 이후로도 ‘살아남기 위해’ 정적들과 끊임없이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엘로이시스 마티니치는 홉스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홉스의 일생 중 상당 기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 요컨대 홉스는 긴긴 세월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보냈다.”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진석용 옮김, 교양인)




 사실 이쯤 되면 충분히 성격이 비뚤어지거나 극단적인 사상을 가질 만도 하다. 그의 일대기를 읽고 나면 그가 왜 그렇게까지 투쟁과 생존을 중시하는 사상을 가졌는지 납득이 갈 정도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홉스는 무척이나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던지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공포를 오히려 유머의 소재로 삼을 정도로 말이다.


 홉스는 비록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굉장히 매력적이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재기발랄하고 언변에 능한 지식인 홉스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는 결혼에는 영 인연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하류층 출신의 지식인에게 시집가고 싶어하는 여자는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다. 결국 그는 9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럼에도 사랑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홉스의 고향 친구인 존 오브리(John Aubrey)는 저서 <Brief Lives>에서 홉스의 여성 편력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린다.


“(홉스 왈) '조화로운 마음을 가진 자라면 여성을 싫어하게 될 리가 없고, 좋은 술을 싫어할 리도 없지.’ ──사실 이건 비밀이지만, 그는 젊을 때에도 술과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절도를 지켰다. 나는 그가 “자신이 선을 넘은 건 겨우 100번 정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장수했는지 생각해보면 (사고를 치더라도) 일 년에 한 번 이상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名士小伝』冨山房百科文庫)
 

 대체로, 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홉스는 결혼만 안 했을 뿐이지 나름대로 불타는 청춘&황혼 시절을 보냈다. 사실 홉스는 다 늙어서도 열정적인 연애시를 남길 정도로 사랑에 적극적이었다. 얼마나 잘 썼으면 존 오브리는 그의 연애시까지(?) 공개해버린다.


“이미 나이 구십을 넘긴 늙은 몸이니

큐피드의 앞에서 선택받으리라는 기대도 품을 수 없고,

오랜 세월 동안 추위가 나의 몸을 식혀서

피조차 돌지 않는구나.


하지만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을

사랑하고, 또 안는 것에도 아직 힘이 있으니,

이것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요, 그럼에도

그 사랑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여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너무도 대담한 일이지만,

혹여 그대의 그것에 닿는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스러운 육신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그것을 사랑하는 이 늙은이를, 어리석은 치로 생각하시게.”

(『名士小伝』冨山房百科文庫)


 …참 열정적인 시다. 나이 90을 넘긴 할아버지가 “아직 연애하고 누군가를 안을 힘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니. 정열적이라고 할지,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늙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이처럼 그는 늘그막에도 항상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현실이 그의 꿈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되었다는 점이 씁쓸하다. 물론 골인만 못했을 뿐이지 100번씩이나 선을 넘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걸 보니, 뜨거운 사랑을 나눌 상대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홉스는 공포와 함께 태어났지만 사랑을 노래하며 살았다. 그만큼 삶의 공포를 직면했다면 인간을 싫어하고 세상에서 눈을 돌린 채 살아갈 수도 있었음에도, 그는 대담하게도 앞장서서 ‘인간의 생존권’을 부르짖는다. 그는 공포에 굴복하는 삶이 아닌, 공포를 동반자 삼아 싸워 나가는 삶을 택한 것이다. 청교도와 국회를 향해 가열찬 독설을 내뱉은 것도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국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사랑이 섞인 쓴 소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를 일생동안 괴롭힌 전쟁의 공포가 그를 사랑꾼(?)으로 만든 셈이다.


 홉스는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말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아니, 반대되는 삶을 ‘살고 싶어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다운 삶과 생존을 갈구했다. 사랑을, 건강을, 행복을, 명예를 얻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공포 속에서 투쟁하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공포는 그의 진정한 동반자이자 형제요, 홉스의 철학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포의 종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공포와 함께 사랑을 노래했던 홉스. 나도 그와 같이 공포를 동력 삼아서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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