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처럼 깊게 박힌 기억
잊어버리고 싶은 이름들이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 어딘가에 콕 박혀서 이따금씩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이름들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머릿속에서 지워질까?
공무원이 되기 전, 꽤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더라도 민원인이라는 불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임용 후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업무에 따라오는 민원들 때문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20분 안에 마무리되는 단순한 민원이나 상담은 괜찮았다. 불만을 가진 민원들도 자주 들어왔지만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문제임이 공감 갔고 내가 조율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 이것 역시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내 업무처리 가능범위를 넘어선 것에 지속적인 민원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타협이 안 되는 개인 간의 분쟁이나 위법해소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런 부분은 협의가 안되면 소송을 해야 하거나 현행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민원인의 편을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날카로운 말로 날 상처 내기 시작했다. "뭘 안다고 거기 앉아있냐.""너 몇 살이냐" 나를 깎아내리는 말부터 "너 고소할 거다""이거 녹음 중이다""이름이 뭐냐" 등의 협박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이거 안되면 저 죽어요. 살려주세요" 그래도 안된다고 하면 "너 때문에 죽는 거야 알았어?"라고 원인을 나에게 돌리며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맹렬한 적의에 마음이 멍들어갔지만 전화를 내가 끊을 수도 없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묵묵히 전화기를 들고 있어야 했다.
나를 지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라도 민원을 제기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그게 내 직업이었고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력과 별개로 항상 긍정적인 대답을 줄순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낸 세금을 훔쳐먹고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괘씸한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바라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같은 이야기와 같은 대답이 몇 시간씩 오갔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몇 주간 반복되는 의미 없는 통화에 정신이 지쳐갔다. 익숙한 전화번호가 보이면 도망가고 싶었고 매일같이 내 잘못이라는 비난에 정말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있는지 고민하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겪는 게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더 많이 알고고 경험이 쌓이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퇴근시간 이후에도 공부를 했다. 관련법이랑 사례들을 찾아서 읽고, 안 풀리는 부분은 선배들의 도움을 구하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고 민원인들은 똑같았다. 더 이상 그들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 남보단 나를 위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혹시 그들의 말처럼 고소를 하더라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근거를 갖기 위해 공부했고 나에겐 잘못이 없다고 위안을 갖고 업무를 버텨나갔다.
하지만 이미 약해진 마음은 작은 비난에도 크게 다쳐 가고 있었고,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진 한 민원인에 의해서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웃는척하는 것도 지겹고 악마 같은 사람들이랑 마주하기도 싫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 아무것도 즐겁지 않았다. 눈물이 집만 가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나오고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어 버티고 버티다 결국 이 자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면직의사를 밝히고 지독했던 민원은 팀장님의 도움으로 을 겨우 마무리했다. 퇴사를 말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모두 민원으로 힘들어했고 지금도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 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나에게도 나만의 방법을 찾으라고 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쳤기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내가 더 일찍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받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하지만 난 속마음을 꽁꽁 숨기는 편이라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시의 힘들었던 기억이 약간은 흐릿해져가고 있다. 이렇게 지난 일을 떠올릴 때면 본인도 오래전 힘들게 했던 민원인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며 위로해 주었던 분이 문득 생각이 난다. 나도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나 역시 지워지지 않는 민원인의 이름이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자연스레 잊힐까?
누군가에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고충을 토로하는 잠깐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쌓여 하루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