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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미생 Oct 29. 2024

#10 깊어지는 우울, 희미한 한 줄기 빛

확신 없는 한 줄기 희망, 하지만 나를 던져야 했다.

정신의학과 약물 치료를 제안받고서는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모니터에 띄워놓은 자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누가 나의 빨갛게 충혈된 눈을 의심할까 봐,

보고 있는 자료가 복잡해 고민하는 시늉을 하며 머리를 감싸 쥔 채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내 마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가시 돋친 말로 인해 불안해서 인 지,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 동안도 초긴장 상태가 유지되었다.

동료들이 나를 부를 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의자가 덜컹할 정도였다.

이미 나의 마음과 행동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내 마음의 둑이 무너져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점심시간, 점심이라도 편하게 먹고 싶어 식당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을 테이크아웃받아 사무실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같은 팀 부장님과 동료 한 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고, 그냥 평소와 같이 짧은 목례를 주고받은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속으로 기도하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의식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법칙, 두 분은 나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XX님, 잘 지내고 계시죠?"


그런데, 그 말이 내 마음에 있던 무엇을 건드렸던 걸까. 없는 이유로 또 주르륵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분이 당황하는 게 느껴져, 황급히 "죄송합니다."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내렸다.

방음이 되어있는 폰박스로 뛰어갔다. 폰박스의 문을 닫는 순간 주체 없을 정도의 눈물을 쏟아졌다.

아, 이 미쳐버릴 것 같은 우울한 생활에 끝이 있는 걸까. 정말 진급만 하면 괜찮아지는 걸까.

왜 나만 이렇게 진급이 힘들까? 도대체 왜 나만 이럴까? 끊을 수 없는 생각의 실타래가 나를 조여왔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연말 조직 개편이 발표되었다.

우리 그룹도 재편되어 2개의 파트로 나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룹원들의 희망 업무 인터뷰를 진행했다.

변화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안주하고 싶은 자에겐 독이고, 변화를 원하는 자에겐 기회다.


나에게 이것은 기회일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나은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폭언을 눈감은 파트장은 신생 파트로, 폭언을 하는 셀장은 기존 파트에 남게 되었다.

기존 파트의 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내 눈물을 마주했던 부장님이 맡게 되었다.

나는 파트장과 셀장 중 누굴 더 감내할 만한 지 판단하여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결정에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에 많은 고민을 할 순 없었지만,

기존 파트에 있더라도 셀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부장님이 파트장을 한다면 상황은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진급 전이다. 진급을 하려면 지금 하이라이트 받는 이 업무가 필요했다.


나의 면담 순서가 돌아왔고, 파트장은 나를 불러 본인과 함께 신생 파트에서 일하겠냐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일을 다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서 마무리는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의 필요로 인해 제가 같이 가야 한다면, 그 부분도 수용할 수 있다고 여지는 남겼다.

파트장은 내가 본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한 듯,

"조직의 결정 그런 말은 필요 없고요. 잘 알겠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넌 이제 내 사람이 아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이후 새로 파트장이 되신 부장님께서 다시 나를 불렀다.

기존 파트장과의 친분 때문에 따라갈 줄 알았는데 남겠다고 해서 궁금했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사건도 있었기에 나의 진급 누락, 멘털이 나간 상황에 대해 말씀드렸고, 그분은 알겠다고 했다.

다만 마지막에 "업무는 아무거나 하실 수 있죠?"라고 물었다.

원래 업무를 가리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 지 모른 채로.


파트장이 바뀐다는 사실에 드디어 내 회사생활에도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왠지 밝고 환한 빛이 아닌, 지하실의 음침한 조명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를 던져야 했다.

지금 나는 창문도 없는 감옥에 갇혀있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대놓고 폭언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라는 희망을 품은 채,

나는 조직개편이라는 쪽배를 타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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