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기승을 부려 땀을 뻘뻘 흘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해가 바뀌고 겨울의 한복판에 있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뎌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연초가 되면 마음이 조금은 싱숭생숭해지는 것 같은데요. 올 해는 또 어떤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지난 한 해는 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를 생각하면 머리까지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조금 달래고자 항상 한 해의 시작 때마다 앞으로의 1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보는 편입니다.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고 상상해 보는 작업인데요. 학교에 다닐 때는 그 년도에 치러야 할 시험이나 만나야 할 사람을 생각해 보고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땐 새로운 집단에서의 적응이나 환경의 변화 등을 예상해 보는 방식입니다.
이번 2025년에도 늘 그렇듯 앞으로의 1년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는데요. 점점 이 작업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엔 해야 할 일과 거쳐야 하는 과정이 뚜렷했고 그것을 달성했을 때와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가 잘 보였던 것 같은데 점점 그런 일들이 조금씩 불분명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사회적으론 어떤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인지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될 것인지
무엇 하나 감이 잡히지 않는데요. 마땅히 치러야 하는 시험이나 넘어가야 할 단계가 있다면 상상하는 것이 쉬웠을 텐데 그런 요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 실감됩니다.
이는 저를 구성하던 울타리들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을 지나 끝내 졸업을 하고 나면 어떠한 울타리 없이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유독 점점 앞으로를 상상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죠. 따라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울타리들의 문을 하나씩 열고 불안정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에게 듣던 잔소리 같은 일들이 실제로 자신의 일이 될 수 있는 세계로 말입니다.
그렇게 점차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조금씩 깊숙하게 들어간다는 것이 저에겐 큰 불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성격 상 무언가에 대한 큰 계획을 그려놓고 대책을 강구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은데요. 결국 이렇게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만들어져 있던 울타리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상이 되지 않는 세계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있고 그만큼 작은 세계에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세계는 이미 지나왔으며 또다시 울타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은 무책임한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라고는 하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부모님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도 없고 또다시 도전을 시작하기엔 돈도 용기도 없습니다.
때문에 요즘은 예상하기 자체를 그만둬야 하는 시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축이나 이사와 같은 현실적인 요소는 예측을 멈추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다른 분야에서는 조금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예상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그저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그 흐름을 따라 올바르게 유영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운이 부족하여 흐름 속에 허우적 댈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수면 위로 뜰 날이 온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적으로 아는 순간이 됐으니 더욱 괜찮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쩌면 점점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 줄 용기를 얻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젠 시간이 흘러 언젠가 심적 여유까지도 얻게 될 날이 오리라 조금씩 믿어 봐야겠습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희생된 모든 분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으신 분들께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