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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여우 Dec 04. 202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by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엇이 현실이고 ,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684)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p.751)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치열한 사색을 담아낸 소설.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p.184)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세계, 외롭고 소외된 인물들, 사랑과 상실의 감정, 메타포로서의 실종,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 등 하루키 문학의 특징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듯한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 중편소설로 문예지에 처음 발표한 이후 다시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장편소설로 출간하기까지 4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작가로서 쌓은 경험과 연륜이 작품에 응축되어 녹아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숙하다는 것은 미완성을 뜻하는 것이기에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와도 같았다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6년 만에 출간되는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라는 후광에도 불구하고 출간 당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마치 무관심했던 상대에 대해 좀 더 알아 가면서 좋아하게 되고 사랑에 빠지다 결국 연인으로 발전하는 관계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나에게 그랬다.


하루키의 소설 속 보르헤스의 짙은 그림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진실인지 허구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 서사. 본래의 내 모습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 여기서 보르헤스의 문학적 세계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어쩌면 보르헤스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벽 바깥세상인 현실에서의 ‘나’는 후쿠시마현 작은 마을 도서관 관장이지만, 그 도시에서의 ‘나’는 시력을 잃은 채 도서관 서고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꿈 읽는 이”이다. 현실과 기억,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며 뒤섞인다. 비현실의 세계이자 무의식의 세계로 비쳤던 그 도시 속 ‘나’는 시력을 잃고 도서관장이 된 ‘현실의 보르헤스’ 일 수도 있고, 현실의 세계이자 의식의 세계로 여겨졌던 작은 마을 속 도서관 관장인 ‘나’는 시력을 잃기 전 과거, 즉 ‘기억 속의 보르헤스’ 일 수도 있다. 보르헤스와 하루키의 교집합에 대한 나의 이런 짐작은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의 동양철학과 생애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며 조금씩 더 구체화되었다. 두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인 ‘도서관’과 ‘읽는 것’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릴 만큼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였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환상적 사실주의 문학으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1937년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시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해 지하 서고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창작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격변을 지나 국립도서관장이 되었지만 실명으로 단 한 권의 책도 읽을 수 없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을 <축복의 시>에서 말한다.


<축복의 시> (1958년)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시력을 잃어 한 글자도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기억이다. 활자로 기록된 것들의 공간. 기억하는 것만 기록할 수 있고, 기록되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이며, 동시에 앞을 볼 수 없는 그에게 ‘기억’하는 일은 ‘읽는’ 행위를 대신한다.


그는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이 멀지 않았을 땐 늘 여러 가지 것으로 내 시간을 채워야 했지요.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난 기억 속에 살아요….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요? 난 상상력이 기억과 망각 속에서 생겨 난다고 봐요. 이 두 가지를 섞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죠.” (보르헤스의 말-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p.50-51)
“이제 내 눈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고,” (바벨의 도서관 p.98)

보르헤스의 삶에서 ‘도서관’과 ‘읽는 것’이 지닌 의미가 특별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 속에서 구현된 ‘도서관’과 ‘읽는 것’은 보르헤스 자신의 세계관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도 그것들은 중요한 서사적 장치이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무한하면서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우주로 보았다. 그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완전하고 완벽한 공간이다. 육각형의 진열실이 무한히 이어진 도서관에는 세상 모든 언어로, 세상 모든 것들을 표현한, 세상 모든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간은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읽는다. 하지만 도서관의 완벽함은 동시에 무한한 지식의 보고 앞에서 혼란과 좌절에 빠지는 인간의 무력감과 한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쩌면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상징하는 바벨탑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무한성 때문에 어떤 것도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동시에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열려있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기에 이 보다 더 적합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불교에 있어 우주 전체의 모든 역사가 나의 몸과 세포 하나하나에, 생각 하나하나 마다 기억으로 담겨 있다고 한다.

굳이 불교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경험이라는 것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쌓여 각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인 만큼 만약 그 기억이 단절될 경우' 나는 누구인지', 그 존재의 모호함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원형이라 일컫는 원시의 집단무의식으로부터 오랫동안 망각했던 태곳적 인간의 그 기억을, 인류의 무한한 지식을 내 몸과 세포와 생각으로부터 끄집어낸다. ‘나’가 ‘오래된 꿈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오가며 사유한다. ‘나’는 ‘나’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는 고야스 씨의 영혼과 엘로 서브마린 소년과의 대화를 쌓아가며 인간 본연의 모습과 마주하고, 존재의 의미에 한 발자국씩 다가간다.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p.358)
 “죽은 뒤에 인간적으로 더 활기차졌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까지 내면에 소중히 감추고 있던 것이 죽음과 함께 밖으로 드러난 게 아닐까요,” (p.370)
“생각해 보면 나는 죽은 고야스 씨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임에도 고야스 씨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의 존재를, 그의 인품을 생생히 회고할 수 있었다. (p.683-684)
 “만약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내가 정말로 ‘일체화’ 했다면, 나라는 인간에게 무슨 변화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소와 똑같은 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나 자신이다. 물과 물이 섞이는 것처럼. 우리는 원래 모습으로 ‘환원된’ 것이다. 나는 그이고 그는 나라고 소년은 단언했다. 우리가 하나 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로써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p.726-727)

보르헤스와 하루키는 동양적 사고방식과 철학으로 삶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 온 대표적 작가이다. 그중에서 특히 그들의 작품들마다 불교와 장자사상이 끊임없이 어른거리며 나타나는데,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 사상과 중도(中道) 사상,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다.


공(空)이란 물질도 현상도 아니다. 원래부터 없다는 무(無)의 개념과는 달리 ‘일체만물이 고정 불변하는 실체나 형태’가 없다는 것으로, 고정됨이 없으니 곧 모든 존재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도서관의 무한성이 떠오른다. 보르헤스와 하루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작품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들은 결국 공(空)의 세계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곳에서는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허구, 진짜와 가짜,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으며, 시간이 조작되고, 우연과 필연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 영겁회귀의 순간을 조우할 수 있다.


공 사상은 ‘중도’ (中道)를 지향한다. 중도 사상이란 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적 수행의 근본으로서 중간을 적당히 취하는 ‘중용’과는 다른 개념을 가리킨다.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즐거움과 괴로움, 있음과 없음, 생과 멸 등 상대적인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고 그 범주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중도 사상의 관점에서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러한 중도의 개념을 이해하면 보르헤스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즉 시공간이 파괴되는 모호함, 현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난해함을 풀어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까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본체와 그림자가 감쪽같이 뒤바뀌는 게.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지 착각하게 된다는 게” (p.152)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p.306)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에는 ‘선’과 ‘악’, ‘참’과 ‘거짓’, ‘있다’와 ‘없다’로 분명하게 구분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있다’ 고도 ‘없다’ 고도 말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영혼’이다.


“고야스 씨가 진정한 의미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이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기척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p.419)


 ‘나’는 고야스 씨의 영혼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태곳적 무의식의 세계와 조우하고 그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가깝게 다가간다.


‘있으면서 없는’, ‘없으면서 있는’ 모호한 상태를 하루키 소설에서는 ‘실종’으로 표현된다. 실종이란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져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야기 전개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이다. 실종은 완전한 무의 상황이 아니다. 하루키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일상의 불확실성을 실종이라는 메타포를 던져 놓는다. 첫사랑 소녀의 실종과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실종은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여정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이끈다. 벽 바깥 세계에서 소녀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도시 안에서 소녀는 존재한다. 벽 바깥 세계에서 존재하던 소년을 어느 날 그 도시 안에서 다시 만난다. 그 사이의 구분이 무슨 소용인지 묻는다.


그 도시의 세계와 벽 바깥의 세계를 구분 짓는 벽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완전한 경계물이다. 그 무엇도 이 벽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 믿어왔지만 실제로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가는 ‘불확실한 벽’이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영혼과 육체, 참과 거짓, 남과 여,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재단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고, 이러한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은 오히려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한계를 경험하게 한다.


하루키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통해 나와 너 사이의 공고했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무한의 가능성이 열릴 것임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완전한 벽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사고와도 같은 그 벽을 뛰어넘는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이다.

또한 ‘나’의 분신인 그림자는 내면의 자아이자 마음일 것이고, 태곳적부터 쌓아 온 인류의 무한한 지식의 보고이자 기억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도시에서의 사람들은 그림자를 버리고 살고 있으며, 벽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의 사람들은 그림자의 가치를 잊고 산다. 결국 우주와도 같이 광활한 내 안에서 인생의 답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p.754)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p.754)
 “그렇습니다.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p.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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