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__년
어제는 고등학교 친구랑 만났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보다 두 살 어려서 사실 친구 아니다. 그렇다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어서 후배 아니다. 친구 아닌 후배 아닌 친구랑 만나기로 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나보다 한 살 어린 줄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두 살 어렸다. 아니 알았었는데 까먹었을 수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육 년 전이었던가. 나는 육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오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쨌든 그간 연락도 자주 한 것이 아니었어서 오육 년 만에 보는 그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했다.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사귄 지 꽤 된, 이제는 삼 년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한국에 방문했다 하여 항상 한국어만 쓰던 우리인데 이제 영어 써야 되나, 어색하려나, 인사는 어떻게 해야 되나, 등 생각에 잠기며 밖에서 기다렸다. 사실 오육 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이고 삼 년 사귄 것도 꽤나 진지한 관계라는 것인데 그동안 연락을 해오지 않은 나에게는 오육 년이 길지 않은 것 같았고 삼 년은 그것보다도 짧은 것 같아서 남자친구 사귀는 것도 어딘가 풋풋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그래, 내가 네가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온 삶의 무게를 판단하는 것이 힘들겠지—나 자신도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겠는 생각에 잠길 즈음에 그가 술집 앞에 나타났다. 안녕.
우리가 고른 술집은 을지로에 있는 십 분의 일이라는 와인바였다. 일요일 밤에는 사람들이 밖에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일요일을 택한 나였지만 나는 대한민국 청춘들의 사랑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의 데이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나의 중학교 친구를 포함해 넷이서 바에 등장해 버린 우리를 보며 바텐더는 당황해 버렸다. 더블데이트도 아닌데 넷이라니. 을지로의 바들은 둘이 아닌 고객을 받는데 서툴렀다. 넷이서 나란히 앉는 자리밖에 없었던 바를 우리는 탈출했고 넷을 받아줄 수 있는 다른 바로 향했다. 걷는 길에 조금은 어색하게 말을 걸어보았다. 어떻게 지냈어. 예상한 대로 그는 잘 지냈다고 대답했고 사실 나도 그가 잘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했어, 이제 어디서 살아, 취미는 이런 걸 하고 있어, 삶 별로 재미없는 것 같아, 아냐 가끔 재미있을 때도 있어,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 이렇게 저렇게 만났어, 엄마도 잘 지내.
이사를 많이 다니던 나는 어릴 때부터 이별에 꽤나 무던했다. 과거에 만난 연인은 헤어지며 나에게 너 웃는 표정 보면 엄청 따뜻할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엄청 차가워—라는 말을 뱉었었고 차가운 나는 겉으로는 아니야, 나 그렇지 않아, 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이학년, 부모님이 갑자기 우리는 미국을 갈거야, 라고 나에게 첫 번째 말했고 당시 결혼할 줄 알았던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떠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떠나감이 평생일 것만 같았던 기분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 후 몇 년을 그렇게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누구는 연락이 끊기고 누구는 연락이 계속되다 보니 하늘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 여자아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잊고 나는 사람들을 잊는다. 중학교 삼학년, 부모님이 갑자기 우리는 미국을 갈 거야, 하고 나에게 두 번째 말했고 사실 입시가 지겨웠던 나는 도피하다시피 미국에 가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반겼다. 나의 환경은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항상 바닷물에 떠다니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뭍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나는 그들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을 향해 수영하기에 나는 힘이 없었다.
바302호라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와인 한 병과 안주를 조금 시킨 우리는 대충 이야기를 나눴다. 육 년 만에 만난 친구 아닌 후배 아닌 친구는 그렇게 파도에 휩쓸려온 내가 본 첫인상으로는 뭍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었지만 그 사실을 잘 모르던 나에게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미국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에 뜨는 영상과 영어학원에서 시키는 숙제에 나오는 지문 정도로 밖에 익히지 못했던 나는 오자마자 여름방학까지 겹쳐 집이 아파트에서 일층짜리로 바뀐 것 이외에는 무엇이 바뀐 것 같기는 한데 뭐가 바뀌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공기냄새가 많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 나는 딱히 독실하지도 않은데 할 것도 없어서 당시 꽂힌 기타를 더 연습하고 싶어 성당밴드에 가입했고 그때 그는 성당밴드에서 바이올린을 하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난 우리는 둘 다 바이올린 기타는커녕 악기 근처에 가보지 않은지 어느덧 오 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고 솔직히 나는 그가 플루트를 한 줄 알았다. 기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은 지어내고 중요한 부분들은 왜곡해 버린다.
그리고 솔직히 엄청 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다니는 고등학교도 달랐고 사는 지역도 비슷하긴 한데 텍사스라서 비슷하다는 기준이 경기도에서 강원도 정도의 거리만 되어도 같은 지역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부모님이 친해서인지 우리는 꿋꿋이 연락을 했던 것 같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이 많이 없던 우리 지역에서 나와 그, 그리고 서너 명 정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내적 친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없었을 수도 있는데 적어도 나 혼자는 그런 친밀감이 있었다. 고등학교 사 년은 그 어떤 사 년보다 길게 느껴졌었고, 왜 그리 길게 느껴졌는지, 그것이 학업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외국인은 뭔지, 미국에 살면서도 붕 떠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인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게 느껴진 만큼 고등학교에서의 삶은 나의 머릿속에 진한 인디고색 같은 페인트 자국을 남겼다. 지금도 가끔 아이폰에 뜨는 2017년의 영상 모음집을 볼 때면 주유소에서 나는 뇌를 강렬히 덮쳐오는 어떤 석유 냄새 같은 것이 난다. 내가 이 냄새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혼자서 텍사스가 아닌 동부에 있는 대학교로 떠나고,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오며 자연스레 텍사스로 돌아가지 않게 된 나는 고등학교에 대한 기억을 다른 색으로 덧칠했고 군대까지 다녀오게 된 나는 내가 꽤나 변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오육 년 만에 만난 그는 십 년 전이나 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고 나도 그에게 그래, 너도 똑같이 생겼어, 라고 말했지만 그건 그냥 원래 사람들이 정해진 각본처럼 하는 말이고 나는 그가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십 대 때만 변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십 대 초중반까지는 계속 변화하는 것 같기도. 어딘가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옷차림도 더 힙해진 것 같으면서도 그는 항상 좀 감각적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사실이 떠오르면서 사실 한국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힙합 안 들었었는데 그가 식케이가 미국에서 뜨기 전부터 나에게 너 식케이 좋아할 것 같아, 라고 말하며 <랑데뷰> 들어보라고 링크 보내준 것이 생각났고 나는 졸업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랑데뷰> 들었고 한국힙합도 들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한국힙합 플레이리스트 들어가 보면 내가 안 들어본 노래가 없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만 해도 내가 더 미국적으로 변해간다고 느꼈고 그는 항상 한국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었고, 오육 년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가 을지로에 있는 카페는 다 알아서 나와 친구를 데려가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네이버 지도에서 갈 곳을 정해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 그래봤자 나의 감각의 한계로 검색할 수 있는 최선은 깐부치킨이었지만, 그렇게 치킨을 먹으러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며 서로 다르게 변한 것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러면서 또 그냥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어, 내가 한국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했고 나는 어, 그거 내가 대학교 때 항상 치던 대사인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군대 때문인지 전 여자친구 때문인지 나는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격으로 새벽 한 시에 일어나 모니터를 켜고 출근해야 하면서도 굳이 한국에 찾아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오육 년 만에 한국에 오는 것이 처음이었고 나는 육 개월 만에 한국에 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쉬웠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택시비로 오만 원을 할애할 만큼 아쉬워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우리는 헤어지며 다음을 기약했지만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어짐에 익숙하면서도 정작 헤어지는 것 자체를 자연스럽게 소화하지 못하는 나는 장난으로 그래, 육 년 뒤에 또 보자, 라고 말했고 그는 웃으며 육 년 아니라 오 년이라고—그리고 이번엔 일 년으로 단축시켜 보자—라고 말했다. 일 년은 뭐고 오 년은 뭐고 육 년은 뭔지, 술에 취한 나는 떠다니는 숫자들의 차이는 뭐고 의미는 있는지 싶어 웃으며 그래, 뉴욕에서라도 볼 수 있겠지, 라고 말했고 막차를 잡기 위해 부랴부랴 길을 건넜다.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 꿈을 꾼 것인지 잠결에 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문득 우리가 진짜 오 년 전에 만났는지 육 년 전에 만났는지, 그것이 2018년이었는지 2019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궁금해져 카톡을 뒤져보았다. 스크롤을 위로 올리며 대화를 하나씩 읽어보자 우리가 만난 것은 실제로 오 년 전이었고 겨울도 아니라 여름이었다. 어떻게 기억을 그런 식으로 했지, 라고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자 하얗게 뒤덮인 도로가 보였고 아무렴 어때. 나는 오늘을 또 기억하고 싶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오늘을 그릴 것이다. 겨울이고, 눈이 왔고, 날씨는 추웠다. 십 분의 일에는 자리가 없었고, 바302호에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 가족도 잘 지내고, 너네 가족도 잘 지낸다. 이제 나는 스물일곱이 될 것이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벌써 십 년 전이다. 그래, 또 파도에 휩쓸리겠지만 언젠간 또 뭍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떠보니 버스가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