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남의 말에 상처를 잘 받는다. 상대방은 장난식으로 툭 던진 한 마디에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느낌. 자존감이 심연의 구렁텅이로 패대기 쳐진 듯 우울했다. 부정적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차에, 잠시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왜 타인의 말에 그토록 연연하며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남의 의견은 그의 의견일 뿐인데 갈대처럼 흔들릴 필요가 있나? 정당한 지적이면 수용하고 고치면 될 일이며 부당한 평가라면 무시하면 될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자긍심', '자존' 두 단어를 떠올렸다. 나의 중심을 지키는 일이 선결되어야 외부에 흔들리지 않을 것 아닌가? 자연스럽게 '나 자신으로의 회귀'라는 테마를 글로써 다루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고백하자면 이 글은 일종의 '치유하는 글쓰기'의 일환이다.
진정한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익히 알려진 지혜였다. 일례로, 고대 이집트 제5왕조 (기원전 25세기) 시절에 고위 관료였던 프타호텝(Ptahhotep)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바람직한 삶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프타호텝의 교훈>이라는 잠언집을 썼다. 망각에 묻혀 있던 그의 글은 이집트학의 발전 덕에 해독되어 4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잠언집에서 가장 백미인 부분은 다음이다. 그는 간결하게 조언한다.
"살아있는 동안 그대의 심장을 따르라" (11장)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영혼, 본질을 믿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짧은 인생에서 따라야 할 명령은 파라오의 명령도, 부모의 명령도, 채찍을 든 주인의 명령도 아니다. 오직 심장이 뛰는 방향. 나의 생명의 원천이자 영혼의 샘인 장기(臟器)의 명령에만 복종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자신의 심장이 요구하고 갈망하는 길을 배신했었는가? 프타호텝의 조언을 읽을 때마다 반성하게 된다.
Thomas Sanchez - El otro yo
2000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인도 아대륙의 수행자들은 <우파니샤드>라는 불후의 고전을 만들어냈다. 그중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에는 다음과 같은 재밌는 대목이 등장한다. 우달라카(Uddalaka)에게는 슈베타게투(Śvetaketu)라는 아들이 있었다. 슈베타게투는 12살에 출가하여 12년 동안 신성한 베다(Veda) 경전을 통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겉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나 완벽한 브라만이었다. 베다의 모든 구절을 암기하며 읊을 수 있었고, 많은 군중 앞에서도 설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찰뿐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온 세상은 그 자아로서, 그 본질로서 '그것'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진리다. 오, 슈베타게투여! '네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아들은 어리둥절해한다. 이런 이야기는 12년 동안 공부하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묻는다.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구절을 암송할 뿐만 알지 본질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버지는 전해주고 싶었다. '너는 경전을 공부했지만 그 경전이 결국 너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네가 바로 궁극적인 진리다!' 온 우주의 거대한 원리가 우리에게도 내재해 있다. 태양을 움직이고 나무를 길러내는 삼라만상의 법칙, 그 강력한 힘이 곧 우리이다. 12년 공부의 목적은 결국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위한 과정이었을 따름이다. 수세기에 걸친 탐색 끝에 인도의 현자들은 결론짓는다. 모든 신성한 가르침의 요체는 '나'에게 이미 존재할 따름이라고. (梵我一如)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 로마 캄파냐의 괴테(1787)
다시 2000년 뒤로 시계태엽을 감아보자. 1700년대 독일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집필한 자서전 <시와 진실(Dichtung und Wahrheit)>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든 일에서 각자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am Ende kehrt der Mensch zu sich selbst zurück)" 괴테는 이 책을 만년에 이르러서 자신의 탄생(1749)부터 바이마르로 출발(1775)까지의 청년기의 추억을 회고하며 집필했다. 이미 온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예술가였던 그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하고자 했다. '결국 인간은 온갖 경험 끝에 자기 본연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대단한 업적과 성취, 지혜를 얻으려 하는 긴 방랑길의 종착지는 바로 '나'였음을 말이다.
문득 오래전에 본 영화가 기억이 난다. 미국 소설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영상화한 영화 <더 로드(The Road, 2008)>다. 영화의 배경은 문명 붕괴 이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이다.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땅은 메말라 앙상한 나무와 말라버린 샘물만 눈에 들어오는 이 암울한 세계. 그 안에서 한 아버지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다.
사회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법과 규범이 상실된 세계는 홉스식 생존투쟁으로 가득한 경기장이다. 즉 외롭고 불쌍하고 불쾌하고 짐승 같이 짧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극한의 환경이다. 식량이 부족해 서로를 잡아먹고 약자는 능욕당하고 버려지는 지옥 구덩이다. 생존을 찾아 떠나는 고단한 여정의 마지막에 아버지와 아들은 영영 작별하게 된다. 아버지는 꺼져가는 숨을 들이쉬며 아들에게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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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불씨를 간직해라. 언제나 그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이 가혹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밖에 있지 않다. 오롯이 나의 소관이자 나의 영토인 마음, 그 마음의 중심에 존재한 본질, 영혼만이 우리의 기둥이다. 일견 미약해 보이는, 가냘프게 타오르는 이 불씨를 끝까지 지켜내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 세계와 사회가 부과하는 그 숱한 의무와 요구는 사실상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나를 지키는 것, 나의 중심을 부여잡는 것, 나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일이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자. 아무리 상처를 입었건 고슴도치처럼 웅크려 겁먹어 있든 간에 훌훌 털고 일어나 나를 믿고 묵묵히 걷는 것이다. 부처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늦은 주말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되새김질하며 축축한 상념에 젖어 있었다. 마치 슬픔에 푹 담긴 장아찌가 된 느낌이랄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떠오른 태양을 마주하기 싫었다. 이불속에 파묻혀 영영 봉인되어 있길 원했다. 잠시 미적대다가 힘겹게 침대 밖으로 벗어났다. 한참을 망설이다 커튼을 젖혔다. 따뜻한 햇살이 나를 감쌌다. 창문 밖에 멀리 보이는 놀이터에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조잘대며 깡충 뛰는 생명들을 바라보면서 배시시 웃음 짓는 나를 발견했다. 다시 세상과 내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엇나갔던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는 기분이랄까.
이불 밖에서 벗어난 내가 다짐한 것은 진부하지만 중요한 결심이었다. 다시 세상에 뛰어들자는 결단. 모욕과 비난과 수군거림과 마주하더라도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그대 안에도 있음을. 용기를 품고 세상과 맞설 수만 있다면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이다. 불씨를 지키는 건 당신의 몫이다. 그것이 미약하고 작아 보여도, 끝내 당신을 살아 있게 할 힘은 거기서 나온다. 그러니 다시 한번, 당신만의 빛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라. 절대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