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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Jul 15. 2024

책 읽기라는 활동에 대한 단상

책 읽는 나날이 남아있으니.....

   

육경(六經)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오.

-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 책벌레(1850)

                               


‘책 읽기’라는 질병(?)     


일전에 어느 신문 칼럼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어린이용 동화책을 소개하는 글이었죠. 

강박적으로 독서에 집착하는 탓에 어머니의 속을 썩이는 악동(?)의 재담을 다루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독서광은 오늘도 두문불출. 책만 읽으며 게걸스러운 지적 탐방을 계속하고 있군요. 그 옆에 심란한 표정을 짓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어머니는 표정을 풀지 않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습니다. “친구들과 밖에 나가서 놀 수는 없는 거니? 아니면 차라리 텔레비전이라도 보는 건 어때? 재밌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많을 거야.” 소년은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고 어머니를 쳐다보죠.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며 딱 한 마디를 던집니다. “엄마도 내 성격 알잖아요? 현대적인 쓰레기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저란 인간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곤 합니다. 하지만 종종 제가 독서라는 활동에 미친 신경증 환자가 아닌가, 섬뜩한 질문을 내던지곤 하지요. 집 앞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 들러 서가에 꽂힌 책을 일별하면서 눈앞의 책을 다 읽고 섭렵하여 누구도 넘보기 힘든 지식과 교양을 품은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리라는 헛된 꿈을 품곤 했죠. 기실 제가 독서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모든 걸 알고야 말겠다는 욕망의 소산이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소화하여 관념을 살찌우는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욕망!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내뱉으며 한 권의 책에 머물기를, 아름다운 문장에 전율하는 순간에 머물기를 결단코 거부해 왔답니다. 책을 덮으면 또 다른 책이 궁금했고, 독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다른 책을 붙잡곤 했지요. 



고뇌에 빠진 파우스트

                                                          

슬프게도, 웅숭깊은 사유와 파격적 시야를 제공해 주었던 초반 독서 편력의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적 삶의 파고에 직면해, 추상적 지식의 무용성을 절감하는 나날이 반복되었고, 책 읽기라는 행위는 고통스럽고 무익한 낭비 행위로 다가왔습니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를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요? 당시 존재하던 학문 전부를 습득했던 파우스트는 종국에는 처절하게 토로합니다. “무익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 여전히 나는 멍청하고 우둔하다! 죽고 싶구나!” 청춘은 이미 멀리 사라지고 추레한 노인네로 전락한 파우스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째로 부정하고 악마와 손을 잡습니다. 



비단 책상물림을 경멸하는 사람만 책과 지식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지식과 지혜가 실은 모종의 허풍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조 어린 고백은 오히려 고매한 지식인과 불후의 작가가 쓴 글에서 더 자주 발견됩니다. 최고의 지혜도 허무하다고 토로하는 전도서의 저자, 근대적 수필의 시조(始祖)인 몽테뉴, 책이란 선인의 참된 가르침이 아닌 껍데기일 뿐이라고 비웃던 장자(莊子), 아, 괴테도 비슷하게 말했네요. “이론은 잿빛이요, 오직 영원한 건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일세!”



미셸 드 몽테뉴



지나치게 책에 험담만 한 꼴이네요. 사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작가들도 그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본심은 정반대라는 걸 알게 됩니다. 키케로의 독서 예찬에 냉소로 응답하던 몽테뉴는 자신의 수필 중간에 은근하게 고백합니다. 책에서 배우게 되는 철학은 죽음을 위한 예비 과정이며, 삶을 온전히 영위하게끔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그는 말만 앞세우는 지식인,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을 늘어놓는 얼뜨기 사제를 경멸하고자 했지, 결코 책과 고전(古典)을 홀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지요. 인간의 모든 문화, 정치, 사상, 심지어 돈을 벌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까지 언어에 기반해 직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가장 유려하게 정련된 산출물은 책입니다. 벌써 책의 효용을 묻는 사람에게 궁색하게나마 해줄 말이 생겼네요.

물론 허튼소리로 가득한 책도 있습니다. 정신을 혼란케 하는 삿된 글을 쓰는 엉터리 작가도 넘쳐나고요. 땔감용으로 적합한 책을 걸러내는 왕도는 따로 없습니다. 자주 책을 읽어나가고, 깨달은 바를 궁구하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좋은 책을 찾는 나만의 주관이라는 게 마련되지요. 그 주관을 걸머지고 책방에 들렀을 때 우리 손에 들리는 책은, 협소한 관념과 세계관에 균열을 가져다주고 이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생각의 물꼬를 열어준답니다. 잘 고른 책을 끝까지 읽고, 살포시 책장을 덮을 때 얻게 되는 상쾌함과 잔잔한 감동은 어쩌면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저는 오늘도 공연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지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ard) - 책 읽는 소녀(1773~1776)



반성의 기예(Techne)     



‘우리 국민의 연간 독서율이 저조하다’는 식의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나 뉴스가 넘쳐납니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패널이 수심 어린 표정으로 독서율 그래프를 읊는 광경도 자주 보게 되죠? 혹은 기름진 얼굴의 유튜버가 “부자가 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운위하는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재밌는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책들의 목록이 주로 자기계발서에 편중되어 있다는 겁니다. 



일반화를 무릅쓰고 자기계발서의 특징을 몇 가지 꼽아보겠습니다. 일단 자기계발서에서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부재합니다. 만약 독자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건 온전히 개인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한 문제죠. 또 다른 특징으로는 무한한 권력 추구, 물질 선망을 부채질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순수과학, 예술의 세계를 다룬 책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죠. “왜 지금의 세계가 형성된 것이지?”, “정의는 무엇이지? 진리란 뭐야?”, “내가 추구하는 성공이 정말로 욕망할 법한 성질의 것인가?” 그 탓에 자기계발서·재테크 노하우를 담은 책과 순학문을 다룬 책을 일괄적 독서 범주로 책정하는 게 적절한 분류인지 의구심도 들곤 합니다. 



물론 인간이 삶을 영위 함에 있어, 처세술과 경제·경영 지식, 그리고 기술과학적 전문성은 몹시 중요한 능력입니다. 본 역량을 결여한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는 과정 중 고단한 실패를 경험케 되리라는 예측도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유념할 점이 있습니다. 제가 위에 나열한 역량은 우리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위를 점한다는 사실을요. 내가 재력, 고급 승용차, 사회적 의사소통 스킬, 자격증 등을 원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안락과 소정의 쾌락, 타인의 인정, 사랑, 가족·친지의 유대, 삶의 의미 등입니다. 불행하지만 작금의 사회에서 수단은 종종 목적으로 변태 됩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오인한 삶은, 끝없는 경주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달리고 힘겹게 종점에 도달해도, 고작 이것을 위해 이토록 진력했느냐는 물음만 내던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생의 종착역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기만과 허상 속에 삶을 소진하고 말았다고 고백하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 판사처럼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28)



인문학과 예술, 순수과학이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데카르트는 말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한 번은 모든 걸 반성하고 회의해야 한다고. 반성 되지 않는 사고는 언제든지 주체와 타자를 향한 폭력으로 돌변할 여지가 있습니다. 삶·가치, 주체의 욕망에 가장 치열한 물음과 탐구를 요하는 ‘반성의 기예(techne)’ 이것이 독서의 본령일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내재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없는 삶은 괴로운 회의와 자기 번민. 아집에 봉착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단한 자기 점검의 물음에 거하지 않으면, 수단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될 위험에 처합니다. 인문학과 예술은 주체의 자기 성찰, 총체적 반성을 요합니다. 독서라는 행위의 진정한 효용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끝모를 자기갱신, 장자가 이야기했던 오상아(吾喪我, 나의 자아를 스스로를 장사지내다)라는 단어를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서재라는 마지막 피난처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이탈리아 소설가 중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란 분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의 한 대목을 설명해 드리고 싶네요.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과 여행자 마르코 폴로의 가상 대담으로 구성된 매혹적인 이 소설에서, 칸(Khan)은 묻습니다. 우리의 제국은 지옥으로 타락해 가는 것인가? 마르코 폴로는 답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산적한 삶의 곤경, 흉흉한 사회 이슈, 개인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에 우리네 소시민의 일상은 위태로이 흔들립니다. 여기에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불필요한 정보들, 마음을 산란케 하는 광고들, 범람하는 화면들의 춤사위가 더해져 우리 개인의 삶은 지나치게 비대해졌습니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조차 과중한 짐꾸러미를 맨 듯 버겁습니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히 안거할 곳이 눈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럴 때면 책이 켜켜이 꽂힌 책장이 반겨주는 나만의 서재로 돌아옵니다. 휴대폰은 잠시 무음으로 바꾸고, 내일의 걱정도 내려놓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틀던, 조용히 내려앉은 침묵을 즐기던 자유입니다. 일단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책을 펼치고 검은색 잉크 활자를 주시할 때 외부 세계에 억압되지 않는, 오롯이 나의 소관인 정신의 영토를 개척합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말합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도 아직 지옥에 물들지 않은 것을 선별하여 공간을 부여할 때 우리는 지옥의 한가운데서도 피난처를 만들 수 있다고요. 우리가 살면서 읽어갈 책과 그 책이 모인 서재가 삶이라는 부박한 병정 놀음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대피장소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느 중세 수도사의 말에 격한 동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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