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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Jul 18. 2024

절망에 대응하는 방법

도피냐 향락이냐 견딤이냐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이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던 것처럼 될 것이다.

(...)

우리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고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해 줄 자 하나도 없으리니

우리의 삶은 구름의 흔적처럼 사라져 가 버린다.

(...)

정녕 한번 봉인되면 아무도 되돌아오지 못한다.

자, 그러니, 앞에 있는 좋은 것들을 즐기고

젊을 때처럼 이 세상 것들을 실컷 쓰자.

값비싼 포도주와 향료로 한껏 취하고

봄철의 꽃 한 송이도 놓치지 말자.

장미가 시들기 전에 그 봉오리들로 화관을 만들어 쓰자.

어떠한 풀밭도 우리의 이 환락에서 빠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

가난한 의인을 억누르고 과부라고 보아주지 말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고 존경할 것 없다. 

약한 것은 스스로 쓸모없음을 드러내니

우리 힘이 의로움의 척도가 되게 하자. 


-지혜서 2:1~11-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 로타르(Rotar, 1964)



긴 인용으로 시작했다. 지혜서는 외경과 정경 사이의 중간지대에 위치하는 특이한 스탠스를 갖고 있는 책이다.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삼아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지혜문학으로서 성경의 일부분으로 수용되었다. 비슷한 어조의 텍스트인 전도서와 마찬가지로 지혜서의 저자는 헬레니즘 시대, 즉 알렉산더의 제국이 유대 지방을 점령했을 당시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이 전통 유대 문화를 밀어내고, 기존의 세계관이 위협받는 아노미 상태에 응전(應戰)하고자 하는 의도 아래 글을 썼다. 



 지혜서는 인생에 대한 귀중한 잠언들의 보고와도 같은 생생한 문학적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중 단연 최고는 위에 인용한 2장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이 세상 바깥'을 보지 않고 '현생'만을 우상시하는 무지한 인간들을 비판한다. 무지한 자들, 악(惡)에 눈이 가려진 인간들은 인생은 어차피 우연이며 어디에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세계를 있는 그대로 향유하고 즐기기로 한다. 우리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뿐이며 구름의 흔적처럼, 안개마냥 흩어져 없어진다는 허무함의 자각은 곧바로 절제 없는 향락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이니 향기 나는 장미꽃으로 단장하고 어디에나 내가 즐긴 흔적을 남기겠다고! 가난한 의인, 현명한 노인들은 힘이 곧 정의요 약함은 쓸모없다는 향락주의 앞에서 무시된다.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 최후의 만찬(1594)


지혜서를 쓴 저자의 생각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는, 거룩한 삶의 보상을 알지 못하는, 지금 사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믿는 이들은 삶을 맘껏 즐기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향락 속에서 타락할 것이며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운명이다' 절대적인 것을 바라보지 않는 삶은 허무하고 의미 없으며 종국에는 향락주의의 덫에 빠져들고 만다. 



정말 그럴까? 절망에 대응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그중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무지한 자들의 향락주의고 다른 하나는 실존주의다. 현존을 넘어서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절대적 의미는 성립되지 않고, 인간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의미의 증발에서 향락주의자들은 무한대의 물질적 유희, 힘의 우상화, 도착적 쾌락의 정당화를 끌어온다. 반대로 실존주의자들은 의미의 증발에서 슬픔과 겸허의 용기를 발견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두 가지 삶의 태도를 가장 확연하게 그려낸 예술가가 있다. 부조리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의미의 증발, 신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조건에 마주한 인간 삶의 분투를 다룬다.  그중 향락주의의 태도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 해당하며, 실존주의의 태도는 페스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드러난다. 두 소설 모두 실재와 영원은 보이지 않으며 지금 이 삶만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라는 견해를 취하지만 주인공의 운명은 사뭇 다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부고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고 그저 무덤덤한 태도만 보인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영을 하고 여자친구와 섹스를 한다. 단지 알 수 없는 짜증과 역겨움, 불쾌감으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살해한다. 교도소에 찾아온 신부에게는 '네 신념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가치도 없다'라고 일갈한다. 재판과정에서도 패륜과 부도덕의 자세로 일관한다. 뫼르소의 뻔뻔함과 냉소, 향락주의 뒤에는 규준의 부재가 있다. 즉, 뫼르소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의미의 상실이었다. 그는 여기서 방황하고, 자유를 남용하고 윤리를 무시한다. 어떠한 척도도 없이 본능만을 따라서 살아갈 따름이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야유 속에 최후를 맞는다. 



이와 반대로, 페스트는 가장 이상적인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의미의 증발과 실존주의가 어떻게 긍정적으로 작동하는지 묘사함에 의해 불후의 작품으로 남는다. 저 무서운 흑사병이 도시를 덮쳤을 때 의사 리유와 장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질병과 투쟁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이 투쟁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 리유는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싸워야 할 것 같아서 싸운다고 말한다. 거기에 근원적인 의미는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표정은 삶·세계의 고통과 무의미에 직면해도 초연함을 유지하는 스토아주의자의 표상이다. 이 표정을 우리는 20C 작가와 예술가에서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위대성이 빛을 발한다. 이것은 삶의 무상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투쟁은 보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주인공들은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뒷받침하는 건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내적인 요구가 전부다. 


그들은 모두 스토아주의적인 인내를 보인다. 오로지 분투만이 삶을 꾸려나가는 길이 된다. 작중 인물인 리유는 말한다. '인간은 관념이 아닙니다'라고. 눈앞에 보이는 인간의 고통을 줄이려는 부단한 노력, 세상에 산적한 악에 맞서는 고투가 있다. 여기에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도전하는 반항이 드러난다. 무의미함과 고통에 맞서는 나약한 인간들의 필사적 반항! 단독자, 실존의 고통을 경감하려는 노력!  결국 실존주의는 신의 죽음에 응전하는 가장 이상적인 윤리적 태도다. 그래서 사르트르도 말하지 않았는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의미의 증발은 절망적이다. 향락주의와 실존주의는 둘 다 절망을 바라보는 슬픈 눈에서 비롯된다. 둘 모두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자포자기적 한숨을 내쉰다. 본질은 모르니 실존만 바라본다. 하지만 전자는 뻔뻔한 자기 정당화와 태만과 반성의 배제, 쾌락의 역설에 의해 타락하고 후자는 분투에 의해, 반항에 의해, 삶 그 자체에 치열하게 임하는 태도로 절망을 극복한다.   '한 마리의 토끼가 절망을 잊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쫓아다니는 동안에는 절망을 잊을 수 있다."는 파스칼의 말은, 인간 조건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절망하려거든 성실하게, 정직하게, 절망 자체를 위해 절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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