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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Aug 01. 2024

그림자와 싸우는 투쟁


그림자와 다투며 달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 장자



허상과 다투다      


하루를 채색하는 감정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날 때 비루한 삶을 당장이라도 끝내고픈 마음으로 깨어났습니다. 왜 매일 힘들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고단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지 재차 질문을 던지며 온갖 부정적인 인상(印象)과 함께 말이죠. 샤워를 마친 후에 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웬걸, 어제보다 더 못생겨 보이고 이목구비가 제각각 따로 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집 밖을 나섰는데 길을 가던 중 가게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니 왜 옷을 이렇게 입고 나왔지? 정말 볼품없어 보이는걸? 신발은 왜 이렇게 별로인 걸 신고 나온 거야? 아 나는 왜 이 모양인 거지?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거지? 어제 새벽에 뭉그적거리다 늦게 잔 게 화근이었나 회고도 합니다. 아니, 저의 탄생과 수태의 시점부터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의식의 흐름의 결론이 나옵니다. “아 오늘은 정말 별로인 날이야. 하루가 기대되지 않는군!”     


돌이켜보자면 제가 살아온 삶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사고의 흐름의 연속이었습니다. 저의 자의적인 감정적 해석이 하루의 향방을 결정짓고, 나아가 저의 존재 전체의 가치조차도 평가절하하게끔 만들곤 했습니다. 근데 과연 이 모든 해석이 세계의 실상에 가닿은 진실한 평가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마음이란 녀석은 홀로 제멋대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인 편한 대로 이리저리 널뛰기하며 비약을 감행합니다.



그러니 어느 선사가 꾸짖은 것이지요. “바람이나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세!” (혜능) 우리는 중국 철학자 장자가 이야기했듯이 그림자, 즉 허상과 다투다 골병이 드는 독특한 습성을 지닌 동물이 아닐까요? 옛날 철학자들의 조언을 떠올리며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죽은 철학자들의 조언     


세네카의 죽음(1614) -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알렉산더 제왕이 페르시아를 무릎 꿇리고 난 후 세운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에서 다양한 철학적 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중 ‘스토아학파’라는 독특한 사람들의 모임도 만들어졌는데요. 그들은 특유의 체념과 수용적 태도로 일관한 삶의 자세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이는 세계의 질서와 구조가 나에게 부여한 운명이니 의연히 받아들이는 초연함을 체득하라!’ 일견 공감이 가기 어려운 주장이지요? 


삶에서 얼마나 버거운 일들이 많이 나에게 찾아오나요? 친지의 죽음, 정인과의 이별 등 사무치는 일투성이인데, 이 모든 걸 다 받아들이라고요? 세네카라는 철학자는 한술 더 뜹니다. 자식을 잃어 우는 부인에게 그는 말합니다.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삶이라는 게 온통 눈물을 요구하는데?” 아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들!           


에픽테토스(CE 50~135)


근데 지나치게 이들의 주장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스토아학파의 현인들이 설파한 것은 간단합니다. 외부에 벌어지는 사태들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사려 있게 판단하여 이를 관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사건에 의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의해 고통받는다.” 


사실 우리는 가짜 괴로움에 휘둘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제가 아침에 짜증 나는 표정으로 미팅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감정의 폭풍은 오직 제 마음이 멋대로 지어낸 허상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제 마음이 빚어낸 멋대로의 감정이 저를 괴롭힌 것이지, 저의 옷과 신발, 얼굴은 그저 가만히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오늘 아침 저를 보았다면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입니다. “어리석구나! 네 마음을 유순한 양처럼 길들여야 한다. 너의 마음이 만들어 낸 그림자와 싸우지 말아라!”라는 쓴소리도 했겠지요. 듣기 싫은 잔소리지만 반박하기는 상당히 어렵네요.      


부처(1906~1907) -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그리스의 반대편 지척에 있는 동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석가모니 이래로 불교 철학자들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강조해 왔습니다. 여실은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며, 지견은 ‘알고 본다’는 뜻입니다. 이에 맞물려서 나오는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입니다. 모든 걸 마음이 지어낸다는 의미인데요.


가령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짝사랑하는 여성분이 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 온 신경이 그 분에게 집중되어 제 자세도 고쳐 앉고 그분의 안면 근육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관찰하고 있습니다. 제가 나름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분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네요! 아차, 제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일까요? 진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낭패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듭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말투에서 자신감을 잃고 우물쭈물 뭉그러지고 맙니다. 결국 어수룩한 나를 더 저주하게 되지요. 

     

근데 정말 그녀가 제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지루하고, 불쾌해서 표정을 찡그렸을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복통이 느껴져서, 혹은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일순 표정이 일그러진 것에 불과할 수도 있죠. 더 나아가 정말 저는 그녀와 ‘함께’ 있는 상태인 게 맞을까요? 제 앞에 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마음이 투영된 허상의 실체와 놀아나는 형국일지 어찌 알까요. 제멋대로 해석한 그녀는 온전히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 제 욕망과 집착, 고착화된 종래의 관념이 투사된 제 그림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기실 우리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사랑한다고 여기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를 백 퍼센트 이해하긴커녕 나의 그림자와만 대화하고 사랑하고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네 인생 전체가 그림자와 유희하는 가면극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섬찟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정견(正見)에 의거해 여실지견,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나의 무명(어리석은 마음)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디서나 제 관념의 그림자와 잔상만을 볼 수밖에 없고, 협소한 자아의 틀을 잣대 삼아 편벽되게 살아가며 고통받는 운명에 당첨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림자와 다투는 일을 관두고 실제 세계와 더불어 뛰놀 수 있을까요?      


3. 세계의 풍성함에 귀 기울여라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 베를린 천사의 시 中

   

우리가 아이일 때를 기억해 봅시다. 중력에서 자유로운 듯이 끝없이 방방 뛰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던 천방지축 시절을요. 어렴풋하게만 회상되는 그 어린 나이의 얼굴과 눈동자를 떠올려 봅니다. 그 눈은 게걸스럽게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세계와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위의 모든 풍광은 흘러넘치게 아름답고, 신비로웠으며, 모든 사물이 저마다의 음률을 노래하고 있었지 않았나요? 어린이일 당시 우리는 모두 애니미즘에 푹 빠진 원시인과 다름없었습니다. 주위 사방에서 전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죠. 바위의 울음도 들었고 계곡물의 재잘거림도 엿들었지요. 질식할 듯 압도하는 색채와 음악이 만발하던 그때는 어디 갔을까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초원과 수풀과 냇물,

땅과 모든 흔한 광경이

내 눈에는 

천상의 빛으로

또 꿈과 찬란함과 싱싱함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밤이든 낮이든

어디를 돌아보아도

내가 그때 보았던 것을 지금은 볼 수 없다.    

  

환상의 빛은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가?

찬란함과 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윌리엄 워즈워스, <송가: 영혼 불멸의 시 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자연과 세계가 제공하는 넘쳐 흐드러진 만화경을 다시금 포착하는 방법이 어디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홀로 만든 허상, 그림자, 욕망과 옥신각신 않고 세계의 풍성함과 직접 연결되는 방법은 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어느 해에야 제가 만든 잔상에서 벗어나 타자(他者)와 세계를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마주 대할 수 있을지! 저는 이런 생각에 젖을 때 어느 옛 선사의 화두를 참구(參究: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곤 합니다. 남송 시절에 쓰인 선어집(禪語集)인 <무문관(無門關)>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출처: 장영우 화백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조사(祖師;달마)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니라."      


이렇듯 아리송한 일화로 구성된 것이 선불교의 어록입니다. 조주 스님은 당나라 시절 고명한 선사(禪師)였는데요. 달마대사는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와서 선불교(禪佛敎)의 법통을 개창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 법통에 속한 학인(學人)인 젊은 스님은 스승에게 여쭙습니다. ‘대체 왜 달마대사께서 이 먼 중원까지 오셔서 가르침을 설파하셨을까요?’ 나름 숙고해서 나온 진지한 질문이었겠죠. 그런데 스승은 뚱딴지처럼 응답합니다. ‘저기 저 앞에 뜰에 잣나무 보이지? 저거 때문에 왔지 뭐냐.’


      

조주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의외로 명쾌합니다. “달마 따위 논하는 헛소리 말고 세계의 풍성함, 여기 그리고 지금에 머물러라!” 대승불교, 특히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강조합니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 남아 있는 과거의 무의식적 기억입니다. 이 아뢰야식의 농간에 놀아나면 우리는 옛 트라우마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휩싸여 존재하지 않는 환영(maya)에 홀리게 됩니다. 


아집(我執) 즉 나라는 집착에 휩싸여 그림자 허상과 또 다투게 되는 것이지요. 조주는 인간의 이런 행태를 지적하고 오직 지금 순간에 머물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제자가 달마를 캐물었을 때, 조주에게 달마는 하등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감미롭게 내리쬐는 햇볕에 만발하는 정원이 있고, 텃밭에 한 우뚝 솟은 잣나무가 하늘거리고 있는데 어디 수백 년 전 노인네 이야기나 되풀이하느냐는 것이지요.      



'풍요로운 구체적 세계의 극적 풍성함!"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글바글 소리가 날 정도로 풍요로운 구체적인 세계의 극적 풍성함”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젖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작달막한 시야를 벗어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자연물들의 삶에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된다면 특별한 종류의 환희가 몸을 관통하리라는 것이지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행복의 정복>(1930)이라는 저서에서 비슷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행복의 가장 큰 요소로는 외부 세계와 사물, 타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개방적 태도가 필수라고요.      



자폐적인 개인의 내면에 골몰하기보다 다양한 대상에 나를 온전히 열어놓는 삶의 양식을 견지할 때 워즈워스가 말했던 ‘천상의 빛’으로 가득한 별천지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냇물이 연주하는 세레나데를 감상하게 됩니다. 외로운 풀벌레들이 우짖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계의 흘러넘치는 풍성함에 귀를 기울이면 삶은 허상과의 다툼에서 탈피해 현재의, 순간이 선사하는 음률에 가닿게 될 것입니다. 그 충만한 시간에 우리는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시작은 결코 없었고

지금 이상의 젊음이나 늙음도 없었다.

또한 지금 이상의 완벽함은 없을 것이며

지금 이상의 천국이나 지옥도 없을 것이다.”     


- <나 자신의 노래 3>, 월트 휘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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