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락여석 Aug 30. 2024

이것이 사랑이던가, 좋다 다시 한번!

이터널 선샤인 2회차 감상평 



어쩌다보니, 우연찮은 기회에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볼 일이 생겼다. 혼자 본 것이 아니고 여러 명과 함께 보았는데 그 덕에 뭔가 새롭게 다가온 점들이 있어 글을 써 본다. 아 그리고 스포가 살짝 있으니 영화를 안 본 분들은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길!




<이터널 선샤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다른 영화 이야기부터 먼저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1994년에 개봉한 홍콩 영화 <동사서독>을 들어봤는가? 무협영화의 외피를 두른 처절한 로맨스 영화로 유명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긋나고 파탄난 사랑의 역사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황약사라는 인물은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이름의 아리송한 술을 들고 다닌다. 그는 말한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이유는 기억력 때문”이라고. 이 술만 먹으면 인간을 괴롭히는 기억을 모두 잊고 살 수 있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잔씩 권유하기 바쁘다. 그렇게 술에 취해 아픈 기억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영화 말미에야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토로하게 된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인간은 기억과 함께 호흡하며, 목줄에 묶인 동물마냥 사랑의 기억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씁쓸하게 인정하며 영화는 끝난다.      





동사서독에 취생몽사가 있다면 이터널 선샤인에는 기억 제거 프로그램이 있다. 주인공 조엘은 그토록 사랑하던 자신의 애인이 본인을 기억에서 삭제했음을 알게 되고 홧김에 기억을 지우는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한다.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오마주처럼 느껴지는 기괴한 장치를 머리에 쓰고 기억을 삭제하는 긴 과정이 전개된다. 내밀하고도 소중한 추억의 영역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며 조엘은 깨닫는다. 괴롭고 찌질하고 신물이 나던 다툼과 반목의 기억도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사랑이란 원래 이렇게 아프고 하찮은 것이며, 인간은 사랑의 추억을 소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그는 지나치게 늦게 절규한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기억을 제발 보전해달라며 애걸복걸한다.      



향연(Symposium, 1874) - 안젤름 포이어바흐


상술한 바처럼 사랑의 비루한 속성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왜 사랑은 기억의 삭제를 갈망하게 만들 정도로 고달픈가? 철학의 도움을 잠깐 빌려보겠다. 고대 서양 철학자 중 플라톤은 ‘사랑’을 다룬 명민함이 넘치는 대화편을 여럿 남겼다. 그의 책 <향연>이나 <파이드로스> 등을 보면 사랑에 대한 가장 시니컬한 분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의 존재를 독점하고자 하며,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 외의 사물, 자기 이외의 인물에 관심을 두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만 얽매여 있게 만들려고 갖은 방해 작전을 펼친다. 직설적으로, 사랑에 빠진 연인은 무엇보다도 상대의 발전과 전인격적 성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낯선 여인의 초상(1883) - 이반 크람스코이

   

실컷 상대방의 성장과 자립을 방해하다 더 이상 연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는 태도가 180도 돌변한다. 그동안 상대에게 할애한 시간을 후회하며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콩깍지와 무지를 탓하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단계를 거친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한 대목이 좋은 예다. 주인공 안나는 남편 카레닌을 문득 보았을 때 모자를 받치고 있는 귀가 몹시도 옹졸하고 혐오스럽게 생겨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브론스키 백작과의 외도를 더욱 격렬히 갈구하게 된다.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이면 동의할 것이다. 사랑스러운 애인의 결점이 갑작스럽게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순간이 있을 테다. 저 하늘의 별도 따올 듯 불타오르던 사랑도 환멸의 새드엔딩으로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헛된 시간 낭비인 사랑의 유희를 거부하고 나의 자아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 따위의 혼란한 감정 소모를 배격하고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비슷하게 생각하며 지내던 중 한 시인의 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정현종 시인의 <사랑은 나의 권력 – 페테르부르크 시편 2>이다. 시의 구절을 같이 읽어보자.      



먼지 가득한 한 소극장에서/나움 코르자빈이란 사람의/<사랑에 대하여>를 보았네(…)/내 사랑 내 귀에 속삭였네/“사랑은 나의 권력”/나는 내 사랑의 귀에 속삭이네/“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사랑이여/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사랑은 생명의 원초적 에너지이자 나를 나의 ‘바깥’으로 이끌고 ‘다른’ 이로 살게 하는 놀라운 모험이며 행복한 도약이다. 인간의 권력이란 대개 타락과 방종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힘없는 것을 살리고 죽어가는 생명을 키우며 절망을 희망으로 이끄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라고.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권력이 아니냐고. 그러니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진심으로 소망할 수밖에. 에로스적 합일의 근원적 교감과 상호이해가 지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권능이라면 약해져서 안 되는 우리의 권력은 사랑뿐이다. 때론 그것이 더할 수 없이 지겹고 아플지라도 말이다. (문학평론가 강계숙 해설)     




사랑은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이를 통해 시련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수하는 모험을 만들어 내는 장(場)이다.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27쪽) 차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사유로 우리를 이끄는 경험이 곧 사랑의 본질적 속성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예술을 설명한 대목이 떠오른다. ‘예술은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한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도 예술이랑 맥이 같다. 나의 이야기, 나의 세계를 벗어나 생경한 새로움으로 주체를 도약하게끔 만드는 감정이다. 어쩌면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앙과도 비슷하리라. 신앙을 가진 이들은 기실 자신이 믿는 신념이 허상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더라도 일단 자신을 내던지고, 투신하고 본다.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라 일단 속는 셈 치며 스스로 몸을 던져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1906) - 에드바르 뭉크



영화 속 커스틴 던스트(메리 스베보 役)가 분한 인물은 니체의 입을 빌려 말한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니체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난과 가시밭길로 그득하더라도 이 모두를 긍정하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일갈한다. 아무리 가슴 저미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금 되풀이해 살아갈 만큼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선언한다. “이것이 인생이던가? 그렇다면 좋다! 다시 한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말한다. “이것이 사랑이던가? 그렇다면 좋다! 다시 한번!”      





사랑을 시작하더라도 다시 서로를 지겨워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클레멘타인의 말에 조엘은 대답한다. “오케이”라고. 괜찮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끝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긍정하며 지금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어떤 성애의 형식이든 간에 모든 사랑의 공식은 동일하다. 일시적이고 짧지만 행복한 꿈을 최대한 향유하는 것!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동행이 막을 내리고 각자의 집으로 홀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닥쳐오겠지만 이를 감수하고 다시금 사랑을 개시하는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단 있는 주인공을 기억하며 나는 여러 번 머릿속으로 되뇐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추신 –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는 재기 넘치는 발랄한 위트로 가득하다. 그의 다음 작품인 <수면의 과학>도 추천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각본가인 찰리 카우프만이 연출한 영화를 더 좋아한다. 찰리 카우프만의 <아노말리사>를 적극 추천한다. 최근에 본 영화 중 단연 손가락에 꼽을 영화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자와 싸우는 투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