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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Sep 15. 2024

삶과 세계라는 속임수

또 허무주의인가?




2013년 개봉한 파울로 소렌티노 감독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겠다. 로마 시내에 가까이 위치한 별장, 발코니 너머로는 콜로세움 유적이 위용을 발하고 있다. 하얀 연미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老)신사는 해먹에 누워 하늘거리는 여유를 만끽한다. 그가 소유한 고급 별장에서는 매일 밤 파티가 열린다. 로마의 부유층과 한량들 무리가 한데 모여 방탕한 밤을 즐긴다. 우리의 신사는 파티의 주인공이다. 수십 년 전 소설 한 권을 쓰고 명성을 얻은 뒤, 쭉 상류층의 삶을 영위했던 그는 사실 활짝 웃는 미소 아래 허무와 환멸을 감추고 살고 있다. 쟁쟁한 명사들에게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고, 화려한 색채의 사치품으로 주변을 꾸미고 살지만, 만족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갈망하고 있다.      


 

그의 기억 속 희미하게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각인된 순간이 있다. 보름달 빛이 은은하게 수면에 드리운 잔잔한 바다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겹쳐 합주하는 순간, 여자가 말한다. “진짜로 멋있는 것을 보여줄까?” 남자는 알 수 없지만 기대로 가슴이 뛴다. 그 다음 여자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순간의 기억이 말소되어 있다. 남자는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었지만 그 기억만은 첫사랑의 각인으로 남아 아름다움의 정수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영화의 종점에 이르러서야 기억은 다시 회복된다. 아름다움의 정수로 남아 있던 기억은 미화된 아름다움의 추억이었다. 그녀는 단지 옷만 벗고 자신의 나신을 보여준 게 전부였다. 환멸이 들이닥친다. 인생을 지탱하던 아름다움의 추억은 그저 ‘나체의 여인’이 전부였다니.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삶과 세계의 충만함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생각보다 간략했다. 주인공은 씁쓸하게 토로한다. ‘전부 속임수였다.’




삶과 세계라는 거대한 수수께끼에 마주한 주체의 욕망과 환멸을 다룬 서사는 굉장히 다양하다. 나는 인도 아대륙의 신화를 떠올린다.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일화이다. 무추쿤다(Muchukunda)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다. 신과 악마 사이의 처절한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공훈을 세운 영웅이었다. 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치하하기 위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무추쿤다 왕의 소원은 뜻밖이었다. 전쟁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그는 영원히 잠을 자게 해달라고 청했다. 어떤 외부의 존재도 자신의 수면을 방해할 수 없게끔 해달라는 조건과 함께.      


신들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는 어느 동혈(洞穴)에 들어 한 겁(劫)이라는 무량한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세계 전체가 멸망했다 다시 생성되고 또 멸망하는 순환의 사이클조차 여러 번 반복될 만큼 아득한 기간이었다. 비슈누의 화신(化身)인 크리슈나가 그를 영겁의 잠에서 깨우기 전까지 말이다. 세상의 주재자 크리슈나와 마주한 무추쿤다 왕은 엎드려 절규한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業)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주님이신 신이시여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온갖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후략) ”     



무추쿤다 왕은 말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과 이에 수반되는 고통과 근심, 쾌락과 유희는 모두 신이 짜놓은 계략이자 잔인한 속임수, 희롱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유정적(有情的) 존재가 겪는 희로애락을 관망하며 유희거리로 삼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노예다. 세계라는 이름의 새장 속에 갇혀 가냘픈 소리로 울부짖는 자그마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적 존재가 직조한 이 괴로운 감옥살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명상과 자기 수련, 절제와 금욕을 통한 해탈만이 그 해답이다. 그리하여 인도의 수행자(沙門)들은 재물과 세속적 관계 등을 집어 던지고 밀림으로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는 길을 택했다.      




인간의 삶에서 겪는 쾌락과 고통, 미추(美醜)의 광경을 예리하게 파헤쳐, 삶의 수많은 면모가 속임수와 가장(假裝), 인지의 오인과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예술가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 인간 조건의 허망함, 인식의 허무를 다룬 가장 예리한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화자는 사랑했던 여인들을 자주 회상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단지 그녀에게 우리 마음의 상태를 투사할 뿐이다.” 또 “실제의 여인은 단순한 매개체에 불과할 뿐, 사랑의 진정한 대상은 그 여인을 향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총체”에 불과하다.     



작중 화자는 그에게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란 그의 당시 인식이 투사한 관념의 다발에 불과했다고 회고한다. 더 나아가 타인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가 착오에서 비롯되며, 아름다움과 추함 등 우리가 다른 대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속성은 나 자신, 즉 주체의 관념과 도착을 투사(Projection)한 자기 반영에 불과했다. 따라서 우리네 삶 전체는 허상을 좇는 과오로 점철된다. 결국 세계는 전부 속임수이고 거짓말이고 얄팍한 환상에 진배없다.      



다만 인도 신화와 다른 점은 그 환상(maya)이 신이 파놓은 함정이 아닌 주체 스스로 만들어 낸 함정이오, 구덩이라는 점이다. 인간 존재가 홀로 속임수에 빠져 환멸과 고통의 수레바퀴를 제 손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주체가 만든 허상과 거닐며 괴로워하는 삶의 비정한 현실을 깨달을 때 환멸과 더불어 모종의 해방감도 경험케 된다. 결국 이 모든 논의는 인도의 고행자들과 비슷한 극기(克己)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이 만들었든, 아니면 모종의 비인격적 물리법칙의 작용이 있었든 간에 우리가 삶과 세계라는 속임수와 계략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어느 소설의 대사를 빌려 ‘삶이라는 게 온통 감옥살이지 젠장!’(그리스인 조르바)이라고 한탄해야 할까? 아니, 굳이 불평을 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그 자리에 버텨 선 채 견디겠노라 외쳐가며 하루하루를 투쟁하는 방법 외에는 없지 않을까. 19세기 중반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20세기를 맞이해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며 세계와 인간 삶의 현존을 탐구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있었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 일컬었듯이 당시의 예술가들은 ‘길 잃은 세대’에 속했다. 그중 대표 격 인물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작품은 인생의 허무에 대응하는 인간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중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를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프레드릭 중위와 간호사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플롯이다. 전쟁으로 찢겨나가는 생명들의 물성(物性)과 판이하게 분리된 추상명사들의 집합인 대의명분과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행렬 앞에 프레드릭은 커다란 환멸에 질식하기 직전에 이른다. 그 어느 것에도 진지한 태도를 취하지 않던 프레드릭은 순수한 캐서린과의 사랑에서 점차 인생과 세계에 엄숙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캐서린이라는 대상은 유일한 도피처이자, 틈입한 삶의 광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삶은 끊임없이 배반당하고, 패배한다. 캐서린은 출산 중에 목숨을 잃고, 프레드릭은 어두운 밤거리로 되돌아간다. 삶에 대하여 가장 진지함을 회복한 순간에 얻게 된 진실한 사랑을 납득 가능한 이유도 없이 잃어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이 들이닥친다. 프레드릭은 모든 존재란 끔찍한 덫에 걸려 있다고 문득 생각한다.      



“언젠가 캠핑을 할 때, 개미들이 빼곡하게 기어다니는 장작 하나를 불 속에 던져 넣은 적이 있다. 불이 붙자, 개미들은 어쩔 줄 몰라 떼 지어 몰려다녔다. 처음에는 불꽃이 지글거리는 가운데로 갔다. 그리곤 장작 끄트머리로 몰려갔다. 거기서도 버티지 못하자 그들은 불 속으로 떨어졌다. (···) 나는 이게 세상의 끝이구나 생각하고 구세주가 될 양으로 장작을 집어 불이 닿지 않은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라곤 그저 장작에 주석 컵으로 물 한 잔을 부은 것뿐이다. (···) 이제야 생각인데, 타는 장작에 내가 부은 물에서 증기가 나와 개미들은 모두 쪄 죽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네 존재 자체도 저 개미들의 운명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파스칼 말마따나 우주는 물 한 방울로도 인간의 목숨을 짓누를 수 있다. 세계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면 우리 문명 전체가 몰락할 수 있다. 미약하고 나약한 인간 존재를 자각할 때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씁쓸하게 되뇔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게 아이러니한 부조리극이자 단막극이자 코미디에 불과할 수 있다고. 죽음을 예감한 캐서린은 프레드릭에게 말한다.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다만 더러운 속임수에 걸려들었을 뿐.”      



이 세계는 우리에게 달콤한 과실을 약속하는 듯 보인다. 노력하고 분투하면 천상의 지복을 누릴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어넣는다. 어느 날에는 햇살이 만발하는 정원의 나무 아래 앉아 휘파람을 불며 잔잔한 희열에 젖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장막을 한 꺼풀만 벗기면 곧바로 삶과 세계의 처절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폴론의 탈을 쓴 디오니소스의 비웃음을 직면하게 된다. 질서와 체계로 구조화된 코스모스(Cosmos)는 실상 카오스(Chaos)의 지배 아래 있으며, 로고스(Logos)는 파토스(Pathos)의 마차를 끄는 시종에 불과할 뿐이다.      




비정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캐서린의 대사를 읊게 된다. ‘이 모든 게 속임수였다고.’ 이 속임수에 직면해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니체 이래의 근대 철학자들은 말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분투하며 저 시간을 초월한 채 우뚝 선 고대 그리스의 석상(石像)처럼 꿋꿋이 버티라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이 무의미와 부조리에 그토록 냉엄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 절대다수의 인간은 거짓 약속과 심리적 솜사탕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어차피 우리네 삶에는 기만적 약속과 희망들이 넘친다. 신의 축복이 천상에 대기 중이라느니, 끝없는 자기 계발로 부자가 되면 행복이 실현 가능하다느니,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으라는 등등 여기에 도취하여 잠깐만이라도 내 삶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이 모든 게 속임수임을 알고 다시 뱉기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누릴 것은 누리되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기! 옛 로마 제국의 귀족들이 음식을 씹되 삼키지 않고 다시 뱉었듯이. 우리네 삶도 엄숙함과 진지함을 잠깐 내려놓음으로써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다. 이 이야기 자체가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공연히 텍스트를 낭비한 꼴일까? 어쩌면 나보고 지나치게 진지하다고 말했던 지인들의 조언이 주효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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