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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Sep 19. 2024

그릇을 씻는 나날

사소한 정리에 의미를 부여하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설거지하는 하녀> (1738)


나 자신이 내적으로 망가지거나, 버거워 기진한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준이 있다. 내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가, 혹은 싱크대에 설거짓감이 얼마나 쌓여있는지가 잣대다. 서울에 혼자 살며 자취방에서 백수 생활에 젖어 스스로 유폐하던 시절의 방을 떠올려 본다. 우주 창조 이전 카오스도 그렇게까지 너저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도 내 방 상태에서는 ‘빛이 있으라’라고 외칠 엄두가 안 났으리라. 하루하루 왜 아직도 목숨을 끊지 않는지 반문하던 암울한 시기, 정신 상태에 걸맞게 주인 따라 방도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다시 취업하고 나서야 방 청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힘든 하루를 끝마치고 방에 되돌아왔을 때 먼지와 너저분한 물건들로 어질러진 방을 마주하면 견딜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선 날, 간만에 방을 청소했다. 개지 않고 팽개쳐 두었던 이불은 각을 잡아 개켜놓았고 기름때가 굳어버린 그릇도 뽀드득 소리를 내며 씻었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지뢰처럼 포진해 있던 머리카락과 잔털도 전부 제거했다. 하수구 냄새로 진동하던 화장실을 청소하고 책이 제멋대로 쌓여있던 책상도 다시 정리했다. 깔끔하게 변모한 방을 지켜만 보아도 생명이 고양되고 인생이 쇄신되는 양 기쁨이 관통했다.      



맞는 말이지만, 강압적이야 당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조던 피터슨이라는 캐나다 심리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일갈한 적이 있다. “까불지 말고 네 방 청소부터 해라!” 물론 그는 열혈 보수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고 발언 자체도 입만 앞선 진보주의자를 조소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다만 그 의도와는 별개로 말 자체에 담긴 모종의 진실을 거부하긴 힘들다. 무언가를 바꾸고,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나의 공간과 육체부터 정돈하는 것이 선결될 필요가 있다. 괜히 옛 유학자들이 수신(修身)을 강조했겠는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의 존재가 안거하는 공간을 정돈할 때야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무라카미 하루키(1949~)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의 책을 읽어보았는가? 대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도회지의 인간이 주로 주인공인데, 그의 소설을 보면 눈에 자주 띄는 대목이 있다. 그는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집 청소를 하고 다양한 재료를 그러모아 요리를 만드는지 자세하게 묘사한다. 긴 호흡의 문장으로 주변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상세한 세목까지 알려주는 것이 예전에는 의문이었다. 왜 이렇게 곁가지처럼 여겨지는, 주 플롯과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까? 우치다 다쓰루라는 일본 철학자의 글을 읽고서야 깨달았다. 그의 언급을 인용하자면 하루키의 글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과정’을 일상사를 통해 묘사한 것이다.     





청소는 무엇을 의미할까? 어지러운 방은 말하자면 엔트로피가 높다는 뜻이다. 무질서도(度)가 하늘을 찌른 상태에서 청소를 통해 질서를 부여한다. 국지적인 질서를 생산한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흩어진 재료들을 그러모아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낸다. 난잡함에서 정돈됨으로 변모하는 과정. 우리가 일상에서 귀찮고 버거운 일로 여기는 정리 정돈은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줄여주는, 실은 우주적 스케일에 가닿은 행동이다.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 물리학자 


정리 정돈은 무질서를 무찌르는 네거티브 엔트로피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과정의 오묘함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 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가 집필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보자. 그는 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명이란 반(反) 엔트로피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생명은 주위 환경에서 양분을 그러모아 형태를 유지한다. 미약한 몸뚱어리를 주변 에너지를 통해 보강하고 생을 연장한다. 물론 종국에는 무질서가 이긴다. 생명이라는 잠정적 질서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어설프게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육체는 문드러지고 썩어 원자로 분해되어 우주를 떠도는 입자로 변모한다. 결말에는 무질서가 이긴다.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이기지 못한다.



생명이 점차 증가하는 우주의 무질서에 저항하여 외치는 가냘픈 목소리이듯, 정리 정돈과 요리, 청소도 무질서에 반항하는 몸짓이다. 청소, 설거지, 가구 정리는 단순히 귀찮은 과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실 따지면 생명을 고양하는 행위다. 너저분하게 쌓인 이불을 개켜놓을 때, 땟국물 찌든 그릇을 수세미로 닦고 가지런히 식기대에 진열할 때,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일 때 우주의 한구석이 생명이 거주할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초라하고 하찮은 자취방이 우주적 의미를 띄는 각성의 순간이다. 나의 사소한 움직임이 온 우주의 질서를 견고히 하게끔 돕는다. 미약한 몸짓으로 생명의 길을 터놓는다. 마음이 고요히 쉴 세계를 만들어 낸다.




      


니콜라스 뢰리히(Nicholas Roerich, 1874 ~ 1947), 티베트, 히말라야(1933)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절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조주(趙州)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그릇(鉢盂)이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중국의 선어록인 무문관(無門關)에 나오는 일화이다. 당나라 시절 조주 선사(禪師)는 고명한 법사로 유명했다. 당연히 명성을 듣고 그가 자리한 관음원으로 승려들이 찾아들었다. 그에게 한 승려가 묻는다. ‘존귀한 가르침을 여쭙고자 합니다.’ 조주는 조용히 타이른다. ‘밥을 먹었으면 일단 그릇이나 씻고 오시게나.’ 그릇을 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밥을 먹었으면 일단 그릇부터 씻고 봐야 한다. 죽을 먹고 그릇을 씻고 밭뙈기를 갈고 졸리면 잠자는 세속적인 일상사가 곧 도(道)이자 깨우침의 길이라는 일갈이다. 이를 마조(馬祖) 선사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일컬었다. 평소의 마음, 종래의 일상이 곧 깨달음이자 부처의 길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별 자각 없이 행하는 허드렛일과 잡일이 위대한 진리와 직결되는 순간이다. 시방세계의 만법(萬法)이 내가 오줌 싸고 똥 싸고 밥 먹고 설거지하는 일에 녹아 있다.  




    

오늘 나는 집으로 되돌아가서 내 방 청소를 다시 시작할 작정이다. 어수선하게 책들이 쌓인 책상을 정리하고 아침에 그대로 두고 온 이불을 접어둘 예정이다. 세탁기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땀에 전 옷을 빨 것이며, 쉰내에 찌든 방의 공기를 디퓨저로 정화할 것이다. 싱크대에 수더분하게 쌓아 올린 식기의 산(山)을 정복해 보리라. 이마에 땀이 맺힌 채 청소하며 나는 속으로 되뇔 것이다. 나는 우주의 법칙과 노닐고 있다고. 조던 피터슨과 고매한 유학자들, 하루키, 슈뢰딩거, 조주와 마조가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고 상상한다. 괴로움에 찌들었던 표정을 잠시 풀고 미처 정리 못 한 싱크대에 시선을 둔다. 운 좋게도 나에겐 아직 그릇을 씻는 나날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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