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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허상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by ANUK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드워드 올비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0년 05월 31일
쪽수 208쪽


목차
1막 재미난 게임
2막 발푸르기스의 밤
3막 귀신 쫓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제목은 사실 아기 돼지 삼 형제의 노래인 누가 커다란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 에서 따온 것이다. Wolf에서 Woolf라는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 책은 올비의 극 대본 형식으로 동작이나 말투 등이 묘사된다.


이 책은 고등학생인 내가 읽기에 굉장히 난해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투나 언어, 행동 자체가 노골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없는 난장판 분위기를 느끼다 온 것처럼 정신이 혼미 해진다. 혼자서 책을 읽는데도 책을 읽는 내내 나도 같이 난장판에 있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저, 객관적인 작품 해설을 써보자면, 사실주의적인 무대 위에서 삶의 부조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미국적 이상의 허상 또는 허위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뉴잉글랜드 작은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인 조지와 그 대학 총장 딸인 마사 부부가 신참내기 생물학과 교수 닉과 그의 아내 허니를 사택으로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그것도 새벽 2시에. 그러고는 3장에 걸쳐 게임을 진행하는데 ‘주인장 욕보이기’, ‘안주인 올라타기’, ‘아이 꺼내기’, ‘손님 잡기’ 등을 한다. 주도자는 주로 조지이며 게임 진행은 마사와 조지가 닉과 허니를 깔아뭉개거나 스스로 폭력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쓰면서 서로에게 상처 주면서 이기는 게임이다. 게임 규칙 따위는 정해지지 않았다. 조지가 게임 규칙이라 하면 규칙이고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극의 가장 큰 특징은 게임이 아니다. 허상이라는 주제로 말장난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내세웠지만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실한 가장이 중심이 되어 현모양처와 귀여운 아이들이 이루는 단란한 가정의 이미지를 꿈꿨고, 이것은 안정과 합의를 바라는 정치와 광고에 널리 애용되는 이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저 ‘미국의 꿈’이었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의 상징 아이콘인 버지니아 울프를 내세워 누가 허상을 두려워하리 라는 노래를 한다.


마지막 장에서 마사는 조지가 주도하는 ‘아이 꺼내기’ 게임을 하는데 마사는 자신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주관적인 견해이다. 나는 울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여기서 버지니아 울프는 거짓 없고 허상 없는 삶이다. 우리는 허상에 둘러싸여 살고 있기에 거짓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이미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나, 진정한 나를 찾아야 된다며 발버둥 친다. 하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사람들은 가짜 나만 볼 텐데. 오로지 나만이 진짜 나를 살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마사와 조지도 사실은 조지 워싱턴, 마사 워싱턴과 이름이 같다. 의도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사실적이고 노골적인 무대 태도들은 정말 가관이었다. 술을 계속 마시고 새벽에 사람을 불러드려 술을 마시게 하고 심지어 닉(허니의 남편)과는 잠자리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무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다 읽고 나서 여운을 주는 작품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목적조차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마 이 작품은 작품 해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결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의미가 확실하게 남았다.


나도 버지니아 울프가 두렵다. 허상 없이는 나를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런데 그뿐이다. 처음에는 허상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싶었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허상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허상 속에 있을 것이다. 마치 마사와 조지처럼.












위의 글은 2020년 고등학교 때 썼던 감상문을 수정을 거쳐 쓴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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