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슴속호수 Jul 02. 2024

소심한 복수

초등학교 6학년의 복수극

  어린 시절에 고모할머니 가족들과 함께 살았었다. 함께 산 아재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아재는 나와 함께 커서 그런지 나에게 그냥 형이라 불러라 했다. 형이기도 하고 아재이기도 한 그는 나의 소심한 복수의 대상이자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전, “누가 누가 잘하나” 어린이 노래자랑이라는 라디오방송을 위한 녹화를 학교 강당에서 하게 되었다. 녹화 전날, 형에게 내일 우리 학교에서 노래자랑 녹화를 하는데 나가서 노래를 부를 테니 방송하는 날에 꼭 들어보라고 자랑을 하였다.


  녹화하는 날이 되자 들뜬 기분으로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사회자가 노래 부를 사람 손들라고 하였다. 진행 과정에서 지정된 몇몇 학생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서기를 좋아했고 키도 작아서 맨 앞줄에 있었던 나는 지체 없이 손을 높이 들고 “저요, 저요” 목청껏 외쳤다. 그런 나를 알아본 것인지 지목하여 노래를 부르게 해 주었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회자가 중간에 노래를 중단시켰다. 내가 박치 음치인지를 그때 알았다. 이날 이후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친구들 보기에 너무나 민망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시기였다. 한껏 들떠서 미리 자랑을 하였건만 놀릴 형의 얼굴이 생각나서 울고만 싶었다. 


  방송이 나오는 날에 예상대로 형은 나를 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을 들었는데 너의 노래는커녕 목소리도 안 나왔다고 놀리기에 나는 우겨 됐다. 노래도 불렀고 라디오에도 나왔다고, 아픈 기억의 분풀이를 하듯이 끝까지 울고불고 큰소리치며 고집과 억지를 부렸다. 급기야 나는 밤늦게 나와서 형의 신발 한 짝을 이웃집 양철 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히죽거리며 잠을 잤다. 


  다음 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학교 가려니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나는 모른 체 새침을 떼고 아무 말 없이 학교로 신바람 나게 달려가 버렸다. 신발 한 켤레가 다였던 시절이었기에 할 수 없이 형은 슬리퍼를 신고 갔는데 학교에서 벌도 받고 혼쭐이 났다고 한다. 통쾌한 하루였다. 학창 시절 나의 첫 번째 소심한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형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서 그런지 그 일이 있고 난 후, 형의 말에는 거의 복종하게 되어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다녀야 할 중학교가 배정되는 추첨을 해야 했다. 집과 가까운 곳, 명문학교, 친한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배정되기를 희망하는 등의 이유로 가고픈 중학교가 저마다 있었다. 추첨이 정해진 전날 밤은 정월대보름이었다. 소원을 빌러 높은 데로 올라갔다.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어른들의 말에 형이 다니고 있는 중학교에 배정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기적 같았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어른이 되기 전 한동안은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빌어보는 그런 습관이 생겨버렸다. 


 형과의 중학교 1년 생활이 3년을 편하게 다니게 해 주었다. 1970년대 남학생들만 다녔던 중, 고등학교에서는 힘센 사람이 학교를 휘어잡았었다. 같은 반에 2년을 유급한 친구가 그 부류의 학생이었다. 학기 초 어느 날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그만 그 친구를 밀치게 되었다. 흥분한 그 친구가 무턱대고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당히 주먹이 매서웠다.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곧장 3학년 형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쳤다. 형과 그 친구는 같은 나이면서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굣길에 으슥한 곳에서 두 사람이 한바탕 붙었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형은 말 그대로 그 친구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사이다 같은 통쾌한 순간이었다. 복수의 대상이 되었던 형이 나의 복수의 화신이 되어 또 한 번의 소심한 복수를 이루어줬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지난날의 소심한 복수를 했었던 과오를 실토하고 잘못을 빌었다. 이상하게도 알고 있었는지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떡볶이를 사주었다.   가슴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뭔가를 떨쳐버리는 듯 홀가분하게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 나는 태권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랑 3년 동안 같은 반이 되었는데 나의 절친이 되고 지킴이가 되어 편안한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소심한 복수 전후로 나에게는 자그마한 변화가 왔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말과 행동이 앞서 큰 코를 다친 이후에는 실천도 안 된 상태에서 먼저 말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결과가 나온 후에 말하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생각도 하게 되고 신중을 기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말 수가 적어진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 이후 학창 시절은 물론 지금까지 지인들과 싸움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말과 행동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왔다. 


 오늘도 나는 소심한 복수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