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어린 줄 알았던 남동생이 어느새 듬직하고 사랑스러운 청년이 되었다
보배의 섬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전학을 가서 이모네 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2∼3달에 한 번씩 광주에 올라오셨고 그때마다 차에는 나와 이모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럼, 그날은 잔칫날이 되었다. 거실 가운데 큰 상을 펴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늘여놓고 온 가족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오실 때마다 가지고 오시는 음식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식구들의 행복 색깔은 항상 집안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광주시내에서 제일 번화가인 충장로에 나가서 내가 필요한 옷과 용품들을 사주시고 용돈도 두둑하게 챙겨주시고 내려가시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8월 어느 날 일이다.
밤 10시쯤 하교를 하고 집에 와 보니 엄마가 옆으로 등만 보이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책상에서 한참 동안 책을 보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났는데 등만 보이게 주무시던 엄마는 몸이 불편하셨는지 내 쪽으로 몸을 돌아누워 계셨다. 그런데
‘아~악~~’
나는 너무 놀라 차마 큰소리도 나오지 않아 마음속으로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배가 남산보다 더 많이 나와 있었다. 다시 말해 임신을 하신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그 잠깐 사이 많은 생각을 했다.
“왜! 왜! 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사춘기 여자아이였던 나는 엄마에게 물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엄마의 배를 못 본 척, 모르는 척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도 아빠 닮은 아들을 하나 낳으면 좋겠다고 항상 말씀하셨고, 엄마도 마음 한편에 그 말을 담아 두고 계셨던 모양이다. 물론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늘 있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만약 셋째를 낳았을 때 또 딸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우리 자매만 예쁘게 키워왔는데 어느 날 엄마의 마음을 변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엄마랑 친한 언니분의 아들이 맞선을 보았는데 맞선 본 여자의 집안이 딸만 둘이어서 그곳으로는 결혼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기가 찰 말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들이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으니 엄마는 우리 딸들도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려면 집안에 아들이 있어야겠다 싶었고 아빠와 의논 끝에 아들을 낳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하다는 한약방에서 약을 짓고 산부인과에 가서 배란일도 잡고 민간요법에 사주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드디어 아버지 47세, 엄마 나이 40세에 아들을 임신하셨고 부모님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주변 분들에게 엄청난 축하를 받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광주에 있고 말씀하시기가 어려우셨는지 엄마의 임신 사실을 내게는 말하지 않았고 광주에 진료를 받으러 오셔도 나를 만나지 않고 바로 내려가셨기 때문에 나는 배가 불러올 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출산일이 임박해지고 노산이라 자주 광주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오셨고 피곤해서 내려가지 못하고 주무시고 가시는 바람에 엄마의 임신한 모습을 보고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엄마의 진통이 시작되었고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아 아빠는 진도에서 새벽에 비상등을 켜고 4시간이 걸리는 시간을 2시간 만에 광주까지 날아오셨다.
얼마나 다급하고 위험했을까? 아빠는 엄마를 병원 응급실에 내려두고 광주 이모 집에 잠시 들르셨고 나에게 차 뒷자리 청소를 부탁했다. 차 문을 열어보니 양수가 터져서 뒷좌석에 피가 흥건했다. 피범벅이 된 차 안을 치우면서도 그때는 막연하게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막상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빠의 다급했던 상황과 엄마가 산통의 고통을 참고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아이를 나오지 않도록 수건으로 잡고 왔을 모습들이 눈에 그려지면서 그때의 긴박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아빠를 따라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 호통을 치셨다
“당신들 미쳤어? 귀한 아들과 산모를 다 죽일 생각이었어?”
라고 하시면서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는데 바로 수술 각서였다. 출산 중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그날의 상황들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무슨 일이 생길까 무척이나 두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남동생을 무사히 출산하셨고 바로, 그날은 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를 세상에 알리던 10월 9일이었다.
그렇게 나와 무려 17년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귀한 남동생이 태어나 다들 즐거워했지만, 나만은 즐겁지 않았다. 위급했던 출산의 과정들이 무서웠고 내 나이 17살에 남동생이 생겼다는 게 실감도 나지 않았다. 사실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 후 남동생이 자라는 모습은 명절이나 방학 때 집에 내려갈 때만 가끔 볼 수 있었고 그 당시에 나는 키도 크고 덩치가 있어서 내가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내 아이인 것처럼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린 남동생이 있는 게 창피했다. 주변 사람들도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아들이냐고 물어보기도 했기에 내가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춘기의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상처가 되었다.
물론 남동생을 돌보는 것은 나보다는 여동생 몫이 컸다. 나야 가끔 집에 내려와서 남동생을 돌봐주는 정도였지만 여동생은 엄마를 대신해서 주말이면 수시로 남동생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면서 챙겼고 늘 같이 놀아주었다. 그때는 여동생도 자기의 생활이 없어서 힘이 들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더없이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고3 여름 방학 때 친구들과 마지막 학창 시절의 추억 만들기를 하자고 의기투합하여 친구 5명과 진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사촌오빠가 터미널로 마중을 나왔고 텐트 2개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설치해 주었다. 그때 남동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친구들도 내가 숨겨 놓은 아들이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렇게 어린 남동생 때문에 놀림받는 일들이 많아지자, 화도 나고 남들이 오해할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만난 3명의 친구들에게는 기회를 봐서 남동생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충장로에서 제일 맛있는 분식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나는 김밥, 어묵, 떡볶이를 친구들에게 사주며 말을 꺼냈다.
“내가 너희들은 친한 친구니까 이제는 나의 비밀을 이야기해 주어야겠어”
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고백을 했다. 친구들은 비밀이 무엇일까 무척 궁금해하며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실은 나에게는 17살 차이가 나는 어린 남동생이 있고 엄마가 나 고등학교 2학년 때 낳았어”라고 말하자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심각하지도 않고 비밀도 아니구먼, 큰 병이 있거나 엄청난 비밀이 있는 줄 알았다”라며 별일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어린 나에게는 숨기고 싶은 크나큰 비밀이었는데 그런 친구들의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비밀을 털어내 버리자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그 당시를 회상하며 웃곤 한다.
그렇게 자주 만나지도 않고 이런저런 놀림들이 싫어 동생을 멀게 느끼던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엄마는
“아직은 어리지만 동생이 크면 너희들도 좋아할 거야.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데”
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엄마에게도 띠동갑 남동생이 있는데 엄마는 삼촌을 볼 때마다 잘 생기고 든든하니 정말 너무너무 좋아.”
“너희들도 동생이 크면 다 알게 될 거야”
이런 엄마의 말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듬직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마냥 어린 개구쟁이 꼬마였기 때문이다.
그 개구쟁이 기질은 내 한 번뿐인 결혼식 날에도 별수 없었다, 큰누나가 시집간다고 멋있는 나비넥타이도 차고 정장을 입혀 예식장에 온 어린 남동생은 몹시 불편했는지 옷을 벗겠다고 고집을 부려 엄마에게 혼이 났고 그 후 울면서 결혼식장 밖으로 나가 집에 혼자 가버린 것이다. 사라진 동생을 찾기 위해 애타던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 덕에 나의 결혼식 사진에는 남동생이 없다.
그래도 남동생이 든든할 거라던 엄마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은 일도 있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는 친구의 큰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도 큰형과 17살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때 문득 내가 죽으면 남동생이 이 모든 장례 절차를 주도하는 중년이 되어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있다.
지금 남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와 이제는 고향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과 생활하고 있다. 어느 날 남동생과 전화 통화할 일이 생겨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엄마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그 듬직한 남동생이 되어있었다.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 버렸을까?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때의 개구쟁이 꼬마는 이제는 보이지 않고 나보다 부모님과 가족들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듬직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17년의 터울이 무색할 만큼 든든하고 의젓한 나의 남동생이 있어 누나는 참 좋다! 낳지 않았다면 어쩔 뻔...”
사랑하는 동생들이 곁에 있어 고맙고 부모님께 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