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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 달라 Mar 28. 2024

관계 이어가기

생각하는 달라


얼마 전 라디오에서 '12년간 사용한 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꾸었어요!'라는 사연을 들었다. 진행자는 '어머, 좋으시겠어요. 축하드립니다.'라며 새로운 가전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청취자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12년? 우리 집에는 20년 된 아이들이 있는데…….'


2004년 12월에 결혼을 했으니 올해가 딱 20주년이다. 그때 산 가전 중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것이 둘 있다. 바로 세탁기와 냉장고이다. TV는 벌써 세 번째, 김치냉장고는 두 번째인데, 세탁기와 냉장고는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노쇠함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몇 차례 고친 이력도 있지만, 작년 여름에도 버튼 작동이 안 돼서 AS를 신청했었다. 세탁기를 고치러 오신 기사님께서 작동 소리를 듣더니 모터가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보다 더 우렁차게 소리를 내면 바꿔야 한다는 뜻이니 잘 관찰하라고 덧붙이셨다. 물 내뱉는 소리에 모터 돌아가는 소리까지 더해지면 '이놈들아! 나 좀 그만 고생시켜라!'라고 호통치는 것도 같다. 요즘은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지 탈수를 할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튀어나와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오분 대기조가 되어 살뜰히 보살펴야 한다.


냉장고도 앓는 소리를 안 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이 녹았다. 뒤쪽으로 살짝씩 얼음이 낀 것이 보이더니 위와 아래의 온도 차이도 생겼다. 며칠 전 겨우 잠이 들었는데 '딸깍 딸깍'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원인을 찾아 남편과 나와보니 범인은 냉장고였다. 척척박사 남편은 인터넷을 뒤적이더니 냉장고에 성애가 많이 끼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냉동실의 음식을 꺼내고 뒤쪽에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제거했다. 덕분에 먹지 않고 쌓여있던 음식을 두 봉지나 버렸다. 열심히 걷어낸 얼음덩어리는 빙하를 닮아 있었다. 남편이 팔 걷어붙이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냉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냉장실의 냉기까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하는가'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AS를 신청했다. 이틀 만에 만난 AS 기사님은 계기판은 단종이 되어 고칠 수 없지만, 간단히 해체해서 안쪽의 얼음을 제거하고 냉장고 모터 주변 청소를 하면 더 사용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12만 원으로 냉장고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기사님이 30분 정도 씨름을 한 후, 냉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긴 인연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전자 매장에서 적당한 가격에 추천해 주는 제품을 골랐을 뿐이다. 한 번씩 수리를 할 때마다 '어휴, 다음에 고장 나면 확 바꿔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한 고비 두 고비를 넘기다 보니 전우애가 생겼는지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도 반갑게 들렸다. 커다란 회색 몸체가 싫어 붙인 꽃무늬 시트지도 이제 볼썽사납게 변했지만, 오늘은 그저 기특한 마음만 컸다.


길들여 사용한다 생각했는데, 내가 길들여졌나 보다.


사물과도 관계라 여겨지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사람과는 어떤가. 생각을 나눌 수 없는 사물에게도 시간과 기억이 더해지니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대화를 하고 생각을 나누는 사람과의 관계 맺음이 더 소중하고 무거운 것은 당연하다. 학창 시절에는 학년이 바뀌면 자동으로 인간관계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다른 반이 되는 순간 복도에서 마주쳐도 어색한 기운이 흐르고, 졸업과 동시에 남남이 되어 버렸다. 성인이 되어도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시간을 들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관계 맺음은 오래가기 힘들었다. 세탁기와 냉장고는 한자리에 서 있으니 그저 내 마음만 열면 되는데, 어디든지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나눌 정도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나와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또한 무게를 달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길들이든 길들여졌든 지금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 또한 그들을 가벼이 대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공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깊은 관계일수록 지레 짐작하고 넘기기 쉬우니 이러한 점을 더 경계해야 한다. 한 번 더 물어보고 예쁜 말을 나누고 먼저 다가가는 노력으로 관계 맺음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 evertonvil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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