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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 달라 May 06. 2024

내 자녀의 뱃사공이 될 수 있을까(feat. 싯다르타)

생각하는 달라


두 딸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고3인 첫째는 하루에 한, 두 과목 편성으로 4일간 시험을 보았고, 중3인 둘째는 여섯 과목을 이틀에 나누어 짧은 기간 시험을 끝냈다. 준비하는 기간까지 한 달 이상을 시험 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요즘 치열한 입시 상황에 시험 기간이 어디 따로 있겠냐마는 나름의 계획을 세워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공부는 아이들이 하는 것이니 엄마인 내가 할 일은 아침에 깨워 등교시키기, 식사 챙기기, 교복 빨아주기, 하루 마실 물 담아주기 등 시시한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잊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 아이들의 감정 살펴주기이다. 


첫째는 고3이 되고 나니 학교 일에 많이 시큰둥하다. 목전에 챙겨야 할 성적이 있으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려 한다. 학교는 시험을 2주 앞둔 시점에 체육대회를 열었고, 하루가 아까운 아이는 체육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불편해했다. 학부모회 단톡방에는 체육대회를 준비하는 엄마들의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학교가 무리하게 일정을 잡은 것은 아닌지 불만이 올라오는 내가 이상한가 생각 들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첫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라는 상투적인 위로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간혹가다 내비치는 공부에 대한 의지이다.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첫째는 '고3이 되니 작년에는 공부를 안 하던 친구들도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아 긴장된다'라고 푸념을 했다. 그리고, '상위권 친구들이 이런 문제집을 풀더라'라며, 저도 해야 할까 고민을 내놓았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둘째와 나는 '풀어보는 게 좋겠지'라는 정답을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먼저 수저를 내려놓으며 던진 첫째의 말에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내가 그 아이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어."


공부는 할 수 없이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불쑥 내비친 자신감에 '그거면 됐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시험 성적은 '기말고사까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자'라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생각하면 나름의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는 지금이 대견하다.


중3인 둘째도 조금씩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중간고사 첫날, 시험을 마친 아이가 전화를 했는데 받지 못했다. 두 시간이 흘러 부랴부랴 전화를 하니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 성적이 생각보다 안 나와서 속상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작년 담임 선생님의 실망한 듯한 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만 것이다. 가족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제대로 받은 사람도 없어서 더 서러웠단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먼저 들어온 아빠를 보고 울고, 엄마를 보고 또 울고……. 저녁 내 눈물바다였다.


시험 둘째 날은 톡이 왔다. 어제보다는 조금 잘 봤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겪어봤던 일들이기에 힘들지만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부모로서 아이들이 겪는 한 계단 한 계단을 바라보는 것은 녹록지 않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대신해줄 수도 없는 과정. 정말 아이들을 위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솔직히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보기에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부처의 생을 전기 형식으로 쓴 것이 아닌가 착각하고 시작하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작가도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부처와 인도의 문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뿐이지 한 개인의 성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친절한 해설을 먼저 읽고 내용을 읽으니 조금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도의 브라만 계급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진정한 수양을 위해 부모를 떠난다. 처음에는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서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진다. 혼자 구도자의 길을 걷지만, 깊은 속세에도 몸담으며 사랑하는 여인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구도자의 길로 들어선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을 만나 진정한 나를 찾아간다.


이 책을 읽고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 중 가장 큰 이슈는 '싯다르타도 아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모'였다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창녀 카밀라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얻는다. 아들이 생긴 것을 모르고 카밀라를 떠난 싯다르타는 시간이 흐른 후 10대가 된 아들을 만나게 되고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지극히 인간적인 부모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아 떠나고 만다. 모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싯다르타마저도 이런데' 아이의 일에 일희일비하며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위로를 받은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스승과도 같은 뱃사공은 이런 말을 남긴다.



아이를 사랑해서, 그래서 아이에게 번뇌와 고생과 환멸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거겠죠. 설령 당신이 아들을 위해서 열 번이나 죽는다 해도, 아들이 겪어야 할 운명의 아주 작은 부분도 덜어주지 못해요.

싯다르타 / 헤르만헤세



그렇다. 싯다르타도 어쩔 수 없었듯, 내 아이의 뱃사공이 되는 것은 어렵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도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 되겠지. 억지로 밀고 당긴들 아이가 겪어야 할 운명의 힘듦을 덜어주기는커녕 엄마의 잔소리를 한 스푼 더할 뿐이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부모로 자녀의 항해를 바라보는 일은 싯다르타가 택한 고행의 길에 감히 견줄만하다.


이쯤 해서 내 역할을 정해보아야겠다. 아이를 내 배에 태우기 보다, 배 한 대를 더 마련해 주어야겠다. 나는 나대로 내 인생의 배를 저어가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의 배를 움직이도록 노를 건네주련다. 물결이 잔잔할 때는 윤슬을 즐기며 노를 잠시 내려놓기도 하고, 큰 파도가 오면 같이 출렁거리며 힘차게 노젓기를 격려하자. 각자의 배를 노 저으며 그날의 날씨를 공유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의논하는 동료가 되는 것도 좋겠다 다짐해 본다.


싯다르타와 함께한 주말


싯다르타저자헤르만헤세출판민음사발매200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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