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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Jan 30. 2024

아이와 여행을 떠납니다

10년 전, 그와 나, 우리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태국이었다. 3개월의 여행을 정리할 마지막 나라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나라 태국이었다. 방콕에서 며칠을 보내고 7시간을 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타고서 코창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짊어진 배낭만큼이나 무거워진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기 위해 방콕보다는 조용한 곳을 찾아 이 섬을 찾아왔다.


배에서 내리니 작은 버스도 하나 없었다. 작은 트럭 모양의 차들이 버스를 대신하여 얼마간의 요금을 받고 여행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덩치 큰 유럽 젊은이들 틈새로 겨우 자리를 마련해 올라타고는 예약해 둔 리조트로 향했다. 장기간의 이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 빨리 침대에 누워 더운 날씨를 잊게 해 줄 에어컨을 틀어둔 채로 누워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2주를 머물 리조트는 저렴한 가격에 비해 썩 좋았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수영장 옆의 식당으로 달려가 새우구이와 맥주를 시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여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고 가자고 서로를 다독거렸다.


무엇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섬도 아니었다. 랜드마크 하나 없는 작은 섬에서 빈둥거리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섬에 대한 정보가 희박하니 오늘은 어디를 방문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어떤 맛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지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수영장에서 빈둥대거나 리조트 정원에 마련된 마사지샾에서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점심즈음이면 쌀국수를 실고서 리조트를 방문하는 오토바이을 기다렸다가 쌀국수로 끼니를 때운다. 한낮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른한 오후에는 리조트에서 빌려주는, 항상 리조트 입구에서 고독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고독"이라 이름을 붙인 스쿠터를 타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섬 아래쪽을 가볼까? 오늘은 위쪽으로? 하루 건너 섬 위아래를 훑으며 돌아다니다 적당한 식당이 보이면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해가 기울면 집으로 돌아오듯 리조트로 돌아와 포켓볼을 치거나 비치바에 앉아 맥주 한잔을 하고는 졸음이 몰려오면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우리가 묵은 방갈로 옆 룸에는 프랑스에서 왔다는 노부부가 머물고 있었다. 4개월째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할머니는 수영장에서 뜨개질과 수영을 번갈아 하며 지내셨고 할아버지는 스쿠터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시는 듯했다. 섬에서 사귄 친구들과 낚시를 다니신다는 할아버지는 섬의 여기저기 가볼 만한 곳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우리 부모와는 전혀 다른 노후를 즐기고 있는 노부부를 부러워하며 "고독"이와 날마다 드라이브를 다녔다. 이 섬에 첫발을 딛으면서 마음먹은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2주를 보내고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내 나라로 돌아왔다.


며칠후면 필리핀의 세부라는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이와 3주간을 지내보려고 작년 초에 계획한 여행 일정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3주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지 생각이 많았다. 지난 1년간 받은 소소한 월급을 알뜰히 모아 가는지라 시간을, 아니 돈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세부에서 꼭 방문해야 할 곳은 어디인지, 꼭 체험해봐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투어는 무엇을 하는지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일정을 꽉꽉 채우려니 골치가 아팠다. 계획적인 여행을 해야 하는 아이아빠의 재촉도 한몫했다.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게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검색을 하면 할수록 개운치 않은 아쉬움이 따라다녔다.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 마음에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일까? 짧은 영어 실력에 아이까지 데려가는 평탄치 않은 이 여행을 어떤 마음으로 계획하게 된 걸까?‘

코창에서 지내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날들이 그리웠다. 내 삶에서 가장 여유롭고 평화로웠던 그 날들. 저녁이면 바닷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풍경 안에 속한 내 삶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했던가.. 3개월간 쌓여 있던 여독뿐 아니라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불안감으로 쌓여 있던 삶의 피로까지도 말끔히 없애버린 날들이었다.


아이와 함께 긴 시간을 여행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는데 또 잊고 지냈다. 영어 한마디를 더 하게 해 주려는 게 아니었다. 바닷속 돌고래를 구경시켜주려 했던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 벗어난 듯 설렁설렁 흐르는 이국의 시간 속을 아이와 함께 한가로이 거닐고 싶었다. 엄마가 엄마의 삶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하는 너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볼 것으로, 할 것으로 가득 채운 여행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아이와 함께 알아 가고 싶었던 건데.. 번지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았다. 부지런히 검색해서 채웠던 일정을 하나하나 지운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가서 지내보련다. 아마도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알지 못해도 괜찮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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