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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Dec 22. 2023

조울증 아닌데
조울증 약 4년 먹은 썰.txt (1)

사실은 성인 ADHD였다

2019년 5월. 정신과 개방병동에 입원했다. 그전까지 내 진단명은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겨우 5일 있다가 퇴원한 그곳에서 내 진단명이 바뀌었다.


"조울증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 양극성장애 2형이에요."


의아하거나 놀랍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건 내가 그 진단에 동의해서가 절대 아니다. 일단 조울증에 대해 잘 몰랐다. '조울증? 극단적인 기분변화를 겪는 병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든 확신을 얻거나 결단을 내리기 위해 남들보다 아주 많은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다. 조울증에 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그래서 그 진단을 부정하거나 반박할만한 근거가 내게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왜 조울증이에요?" 혹은 "조울증이 어떤 병인데요?"라고 묻는 대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치료 열심히 받으면 완치될 수 있나요?"


나는 낫고 싶었다. 너무 간절히도, 아주 비굴하리만치, 정상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진단명이 뭐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가 무슨 병이든 간에 나는 언젠가 완치될 것이고 꼭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뭐가 되었건 진단명이 바뀐다고 하니, 내가 4년간 우울증 약을 먹고도 별 효과를 못 봤던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울증이 뭔진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조울증이고, 근데 조울증 약 대신 우울증 약만 주구장창 먹었으니, 안 낫는 게 당연한 거였어!' 하는 생각이 들자 이 낯선 진단명이 차라리 새 희망 같았다. 


"저는 완치에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을 먹고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완치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젊은 의사 선생님이 신뢰감 가는 말투로 내게 대답하셨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래, 약을 계속 먹든 끊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싶었다. 진단명이 바뀐 걸 새로운 기점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앞으로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그리하여 올여름 ADHD로 내 진단이 정정되기까지 장장 만 4년간 조울증 약을 먹으며 조울증 환자로 살았다. 제목에도 썼지만 결과적으로 난 조울증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다니는 병원 의사 선생님이 "조울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조울증이면 이럴 수 없습니다.", "조울증으로 과잉진단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등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내게 거듭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올 초부터 지금 병원으로 옮겼다. 웃긴 건 ADHD로 진료 방향이 틀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는 말 그대로 동태눈깔로 병원에 다녔다. 진료실에서도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좋은 말씀 하고 계시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 어떤 말도 내게 닿지 않았다. 나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 따뜻한 분 같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그마저 라포가 쌓이기에는 너무도 얄팍했다. 


그러다 올 4월에 처음으로 선생님이 ADHD 얘기를 꺼내셨다. 1페이지짜리 약식 설문지를 주시더니 지금 해보라고 하셨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설문지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임했다. 솔직하게 체크하지 않았다. 그런데 ADHD로 나오도록 체크한 게 아니라, ADHD로 '안' 나오도록 체크했다. 


조울증도 받아들인 사람이 ADHD 진단은 왜 기피했느냐고 물으면... 일단 내가 그전에 다른 병원에서 먼저 그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단칼에 빠꾸먹었기 때문에 일종의 신포도효과 같은 게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ADHD 치료를 못 받았는데 ADHD면 너무 억울하니까 차라리 아니길 바랐던 것도 같다. 건강한 마인드가 절대 아니지만 솔직히 좀 그랬다. 


그리고 조울증은 어렵더라도 완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야 ADHD 치료를 하면 완치가 정말 요원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은근히 조울증 완치 판정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내 동태눈깔을 4개월간 직관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이걸 알게 되신다면 기가 차시겠지만 난 그때 내가 나름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진단명으로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체크한 걸 보시곤 애매하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몇 페이지짜리 정식 설문지를 주시고 체크해 오라고 하셨다. 집에 가서 체크하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증상도 ADHD라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물론 딱히 공감 안 가는 문항들도 있긴 했지만, 어떤 문항들은 그냥 체크만 할 게 아니라 누구 앉혀놓고 1시간쯤 떠들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뼛속 깊이 공감이 갔다.


그다음 내원에서 ADHD 고위험군이란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은 고심하시더니 '모험'이지만 가치가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조울증 약과 ADHD 약은 기전이 달라 만약 내가 '진짜' 조울증 환자일 경우 ADHD 약물을 시도하는 것이 조증을 유발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의료인으로서 그분의 진정성보다는 '모험'이라는 단어의 흥미진진함에 꽂혀 냉큼 동의했던 것 같다.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할 말이 많다. 그래서 편 수를 나눠서 쓰려고 한다.

이다음 편에는 조울증으로 진단된 이유/ 조울증 약을 먹으며 겪은 부작용/ 오진을 의심하면서도 계속 진단에 순응한 이유에 대해 나눠서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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