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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 Apr 18. 2024

그 나무에 그 나무

2024.04.15.



  한참 전에 해뒀던 미용실 예약을 까먹을 뻔했다. 휴대폰에 예약 한 시간 전이라고 알람이 울려서 곧바로 뛰어나왔는데, 얼마 가지 않아 긴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한참 동안 서있었다. 빨간 불이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 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발밑을 봤더니 내 눈에 익숙한 열매가 있었다. 갈색 체리같이 생겼다. 대추 같기도 하고. 단추 같기도 하고. 솔방울 같기도 하고. 이 귀여운 열매는 메타세쿼이아의 열매다. 열매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자기들끼리 모여있었는데 오랜만에 하나 주워 들고 싶었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학교 안팎으로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후문 씨유 맞은편에 딱 한 그루 있으면서 초여름만 되면 묘한 향기를 골목 가득 뿜어내는 엄청나게 큰 밤나무, 먹지 못하는 감들을 가지 무겁게 늘어뜨리다 결국 바닥에 떨어뜨려 피하게 되는 유치원 앞 감나무, 초 봄 후문 매화나무, 중간고사와 개화가 매번 겹쳐서 바쁜 와중에 꽃이 핀 쪽으로 일부러 걸어가며 겨우 봄을 누려보았던 벚꽃나무, 쌍으로 있는 청단풍 홍단풍, 후문 입구에 있는 목련나무, 어디선가 자꾸 향기를 풍겨서 강아지처럼 킁킁거리고 찾아내게 만드는 금목서 은목서 천리향, 한눈에 봐도 소나무, 줄기도 꽃도 빠짐없이 예쁜 맥도날드 옆 배롱나무, 사과대 정자에 있는 보라색 꽃 등나무, 폭탄 은행나무, 오거리 플라타너스, 도토리가 열리는 수의대 앞 졸참 나무며 향기와 날씨에 설레는 봄의 이팝나무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봐온 나무들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겠지만, 꽃나무를 제외하고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나무는 메타세쿼이아였다.


  학교 정문과 후문에 키가 유독 커 보이는 나무들은 전부 다 메타세쿼이아라고 보면 된다. 예쁜 꽃이 피거나, 좋은 향기가 나거나, 맛있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아니다. 그런데 옷을 유독 자주 갈아입는다. 새 학기 봄에는 투명한 연두색의 잎, 여름에는 진한 녹차 아이스크림 색이었다가도 가을엔 빽빽한 잎들이 단풍보다도 더 빨갛게 물드는데, 왜인지 그 모습이 좋아서 학교 다니면서 찍은 사진만 해도 같은 구도로 여러 장이다. 그러다가 나뭇잎들은 땅콩버터 색이 되고 갑자기 잎들이 왕창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엽수인데 동시에 낙엽수다. 외투를 입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겨울이 되면 얇은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게 된다. 메타세쿼이아의 수형은 말할 것도 없이 예쁘기 때문에 잎들이 있든 없든 여하튼 정말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무의 꼭대기에는 항상 까치집이 있다. 나무가 평균적으로 30미터 정도까지 자란다고 하니 우리가 사는 아파트 10층 정도인 셈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의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올려다봤지만 그해 봄에 까치들이 십 층높이에 신혼집을 장만했다는 사실은 새들이 이미 방을 뺀 겨울에서야 알게 된다. 나무가 여기다 집 지어달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새들의 선택으로 우연히 정해지는 거니까 그것도 특이한 액세서리 같고 좋다. 나도 까치였으면 학교 근처 여러 나무들 중에서 메타세쿼이아를 골랐을 것 같다.


  우리 아빠는 나무일을 20년 넘게 했나? (작년부터 나무일을 하지 않게 돼서 정확히 잘 모르겠다) 여하튼, 몇 년 전에 아빠한테 ‘여태까지 일하면서 여러 가지 나무들을 많이 만져보고, 살피고, 사고, 팔고 했을 텐데 그중에서 어떤 나무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아빠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소나무를 꼽았었다.


  예전에 아빠 휴대폰 사진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름이 내 키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들의 단면이 수도 없이 찍혀있었다. 나는 아빠가 무슨 나무를 취급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이 어렵고 누구도 모를 나무를 대답할 줄 알았는데, 우리 강산 천지 사방에 흔하디 흔한 소나무를 골랐다는 게 신기했다. 그 사진들도 소나무 였으려나? 아빠가 좋아하는 나무가 소나무라는 대답만 듣고 이유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고, 안 휘어지고, 잘 팔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길에서 내가 좋아하는 메타세쿼이아를 만나서 반가웠고, 미용실 예약 시간에 늦을까 봐 급히 메타세쿼이아 아래를 걸어가는 동시에 이제는 나무일을 하지 않는 아빠가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에 대해서 대답해 줬던 일이 떠올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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