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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Dec 18. 2022

빈곤 포르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수시로 해외 출장을 다니며 모금 방송을 촬영했다. 담당하는 팀이 따로 있기도 했지만, 국가담당자이거나 일정상 덜 바쁜 직원들이 경험 또는 지원 삼아 일정에 합류하기도 했다. 언젠가 내가 방송 촬영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했더니 어떤 직원은 ‘운이 좋았네요’라며 눈은 웃지 않는 미소를 띠었다. 글쎄, 내가 굳이 피하거나 원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는데 그분 기억에 방송 촬영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아마 촬영 장소가 시각적으로 극한의 상황을 연출하기 쉬운 슬럼가, 쓰레기장, 고기잡이배 위, 그 외 수많은 노동 현장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방송관계자와 유명 인사를 극진히 모셔야 하는 데서 온 감정적 피로 때문이었을까.     


촬영한 영상이 방송되는 당일 우리는 실시간 전화응대를 하러 한곳에 모이곤 했다. 그때만 해도 직원들이 새벽에 직접 후원 문의 전화를 받았다. 외부 업체에 맡기기보다 조직과 현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내부 직원들이 직접 능숙하게 응대하면 후원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다는 게 주요하게 설명된 이유였다. 여러 기관이 모여서 각자 촬영해 온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는데, 어떤 장면은 우리가 보기에도 부끄러운 게 있었다. 그게 사실은 얼마 전에야 더 많이 알려진 ‘빈곤 포르노’와 유사한 거였다. 오랜 영양실조로 배가 부풀고 발가벗은 채로 눈물 흘리며 누워 있거나, 질병으로 곪은 발의 상처에도 학교 수업을 놓치지 않거나 가족의 생계 부양을 위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 여기서 핵심은 죽음에 가깝도록 절망적이거나 미래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는 아이만이 후원받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거였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어 보이는 실직한 중년 아저씨나 학교를 떠난 일명 불량 청소년들은 그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아프리카 대륙 아이들의 비극적인 삶이 마치 피부색이 밝은 어른들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꾸준히 생산해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이 화면에 나가면, 후원을 신청하는 전화벨이 유독 많이 울렸다. 더 많은 자원과 대중의 관심을 동원하는 게 주요 밥벌이인 사람들은 직관적인 감정 메시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걸까. 아무리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잘 팔리는 콘텐츠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건 그들로선 어쩌면 시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거였다. 반대로 아이와 지역사회가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지 예상할 수 있다. 어느 기관은 그걸 직접 실천했는데 그 영상이 송출되는 몇 분간 전화벨이 거의 울리지 않았다. 그 고요한 틈을 타고 ‘난 저 기관 영상이 좋아. 근데 어떡하냐, 저기 이번 모금은 망했네’라고 다른 기관 직원들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들리기도 했다.     



평소 한없이 착한데 가끔 고집불통인 탓에 사람들이 놀랄만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동료가 있다. 한번은 그가 모금 방송 촬영을 갔었는데 프로듀서가 사례 아동의 흘러내린 옷이라든지 취약한 모습을 자꾸 부각해서 담으려 했다고 한다. 물론 아이의 평소 모습이나 생활 반경에 대한 촬영 동의를 사전에 받기는 한다. 그래도 아이를 무기력한 수혜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로 담는 게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경우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가깝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런데, 그 동료도 비슷하게, 아니 더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자극적인 장면을 찍지 말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다가 나중엔 결국 촬영감독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버렸다고 한다. 평소 그의 행실을 아는 사람들이 때때로 혀를 내두르며 하는 이야기니까 그게 얼마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주말에 나오는 모금 방송을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10년 전에도 저런 영상 봤었는데, 왜 아직도 저렇게 상황이 똑같니?"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시지만, 오늘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때처럼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니까요"라고 정답같이 들리는 틀린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이랑 관련이 있지 않을까. 빈곤이 포르노가 된다면, 전쟁은 포르노의 원조 격 아니었을까?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서사 속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한 명의 영웅과 가련한 피해자의 드라마. 전쟁을 보도하고 알리는 방식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울부짖는 사람들, 무너진 건물들, 버려진 차량과 난파된 집, 떠다니는 나뭇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는 ‘맥락’ 없이 오직 ‘지금’이라는 드라마다. 요한 갈퉁과 제이크 린치라는 평화학자는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문제와 사건 그 자체보다 기저의 갈등과 사회구조를 비추는, 적의 거짓을 밝히고 나의 거짓은 숨기는 대신 모두의 진실을 알리는, 어디선가 떨어져 내려온 엘리트의 입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을 빌리는, 한쪽의 승리보다 양쪽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평화 저널리즘*을 주창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 위한 대중매체의 사명과 노력은 치하받아 마땅하지만, 그 영향력에 상응하는 만큼 편견이나 갈등을 조장하지 않으려는 책임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 요즘 우리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나 영상을 보면 전두엽보다 손가락이 먼저 반응한다. 외부 자극에 민감해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콘텐츠를 클릭하고 있었다. 번뜩 ‘내가 방 안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몸을 움직이자.’ 싶었다.



누군가는 빈곤 포르노가 하나의 관습처럼 이어지기 까지 책임이 있는 기관들이 아무런 목소릴 내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조직 밖에서 사견을 밝히는 건 자유지만, 개인의 목소리가 조직의 더 큰 입장으로 이어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업부서에서 어떤 성명문을 준비해도 홍보부서의 수정 검토 없이는 외부로 나갈 수 없었으니까. 그런 단계를 거치다 보면 날 것의 언어들은 그 의미가 희석되거나 아예 달라져 버리기도 했다. 다른 부서와의 합의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부분을 실감하게 했다. 비영리 조직에도 변화를 위한 발걸음과 위기관리 시스템이 동시에 운영되니까 하나의 가치로만 생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게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것 같은 거여도 일단은 생명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논리이니까. 그래도 꼿꼿하게 내 의견을 계속 뱉어낼 수 있을까. 깨지고 부서지는 건 막힘 담이 아니라 조직에 대한 내 희망이어도, 떠나지 않는 한 부딪혀보는 걸 테다. 변화를 위한 대의보단 아마 내가 나로 남아있기 위해서.



*제이크 린치, 요한 갈퉁 (2016). 평화 저널리즘(김동진, 역). 선인. (원본 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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