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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Dec 18. 2022

직업으로서의 국제개발과 NGO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다시 모인 자리에서 오랜 친구들은 또 다시 오랜 농담을 던졌다. 내가 하는 일이 ‘유니세프가 하는 일 같은 거’라는 편리한 이해를 가지고 마더 테레사를 빗대는 것.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지어‘주고’ 궁핍한 이들에게 식량을 쥐어‘주는’ 것 이외에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됐는지 더 궁금해하지 않는 이상 굳이 부가적인 설명은 곁들이지 않았다. 오래 이야기할수록 주말 저녁 한껏 흥 나는 소식을 떠들기도 모자란 식사 자리와 거리가 조금 먼 이야기가 될 테니까. 사적인 자리에서 새로운 반경의 사람을 만날 때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과 목적을 선택한 게 존경이라도 받을 만한 것처럼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자주 받았다. 사실 직업을 택할 때 연봉이 1순위가 아니었을 뿐 생계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는데, 타인의 눈에 의하면 우리 가족이 동의하지 않을 만큼 세상 숭고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인의 삶은 실로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돈을 통해서든 지위를 통해서든 명예를 통해서든 선행을 통해서든 ‘누군가로부터 (그것이 신이든 타인이든 자신이든)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행위일 텐데 말이다. 



‘힘들고 좋은 일 한다’라는 가깝고 먼 지인들의 찬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우리의 착각을 잠시 가라앉혀 놓고 보면 모두가 대의명분에 현혹되기 쉬운 존재 같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목적이 반드시 좋은 수단을 택하거나 좋은 영향을 일으키는 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떠들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닐 텐데. 무엇보다 다른 모든 직업처럼 햇수가 더해질수록 첫 마음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사명감보다 생계를 위해 이어가기도 하는 게 같으니까. 점심시간 대화 주제로 주식이나 부동산 이야기에 아는 체하며 거들지 않으면 세상 물정 모르거나 최신 동향에 뒤처진 계몽 대상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같은 조직원 중에는 코인이나 부동산으로 짭짤하게 수익을 올려 직장은 그저 취미로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기보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거라고 들었지만 우리 자신까지 가난해지긴 싫은 것 같았다.



동료들은 이 분야가 전문성과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봉사와 헌신만 강요당한다는 억울한 마음을 비치기도 했다. 필요 이상의 학위에 대한 압력은 둘째치고, 외부 환경에 시시각각 변하는 저개발국 상황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지역에 사업 활동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관리적인 고민을 하는 게 결코 공짜로 당연하게 바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일거다. 어떻게 하면 소수민족 아이들도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을지, 도서지역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할지, 그곳 사람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정서와 체계 배우기를 놓지 않는다. 출장을 가지 않아도 사무실에서의 시계는 늘 빠르게 흐르고 어떤 이들에게 매일의 야근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같은 경력으로 거의 두 배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단순히 물가 때문이라거나 모든 직업의 급여 수준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반만 맞는 것 같았다. 그보다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인정하고 그만큼의 응당한 대가를 치른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우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지인이나 가족으로 두지 않은 조금 먼 이웃들은 우리의 일이 마치 무급봉사 또는 그에 가까운 박봉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애써 기부한 돈이 정확히 가난한 사람에게만 쓰이고 그 외에는 절대 허투루 쓰이지 않기를 바라는 얼마간에 정당한 마음일 것이다. 비영리 기관도 인건비와 운영비가 필요하고 그 비율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수익을 요구하는 투자금’이 아닌 ‘변화를 요구하는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기관은 윤리적 기준과 회계 투명성에 대한 잣대가 더 엄격하다. 고객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몫을 돌려주기만 하면 되는 일부 산업과 달리 불신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일을 가장 열심히 많이 하는 말단 직원들의 월급이 가장 적어야 하거나 열정 페이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건 뭔가 잘못 채워진 족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할 때 누군가는 보람이나 자기만족이 그 대가가 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그에 상응하는 만큼 시간적 헌신과 금전적 희생을 안팎으로 요구받는 건 이 직군의 사람들이 분노에 차 떠나거나 무기력하게 남아있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직업이지 봉사 그 자체는 아니니까. 그럴 때면 한 번 상상해보곤 한다. 금전적 보상이든 그 어떤 혜택이든 일하기 좋은 환경이 되면 열심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더 오래, 지속가능하게 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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