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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Dec 30. 2023

#3 지속가능성과 역동성

끝을 생각하는 과정

그날도 사업 종료보고서 단어 하나하나를 매만지고 있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낸 사업이었는데 가뿐한 마음으로 오른쪽 모서리 엑스 자를 누를 수 없었다. 과거를 추적하는 역사가들의 마음이 그랬을까 싶다. 현장에서 온 활동 보고서 묶음을 유일한 나침반 삼아 골똘히 선후 관계를 그려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왠지 어정쩡한 기분으로 커다란 질문을 마주한다. 사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다.




사업이 끝난 후 지속가능성 찾기, 결국엔


에티오피아에서 2년 반 동안 진행된 사업은 열악한 지역의 청년들에게 직업기술 훈련을 지원했다. 결론적으로 취.창업 인원이나 소득이 증가한 가구 수는 목표를 훨씬 웃도는 숫자로 보여졌다. 나는 약간의 뿌듯함을 뒤로하고 당시 사업관리 총괄 책임자에게 보고했다. 그분은 물었다. “그래서 사업이 끝나면 이제 그 지역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순간 나무에 고정돼있던 눈이 숲으로 열렸다. 아쉽게도 그 사업이 기획된 건 중장기적 전략이나 포트폴리오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후에 추가 사업을 진행할 예산이 없었기에 나 또한 눌러 담아둔 질문이었다.


당장 입술에 맴돈 말은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였다. 하지만 곧이어 ‘어느 정도의 사실’과 ‘듣고 싶어 하는 적당한 진실’ 사이의 말을 찾았다. 사업의 태생적 한계와 앞으로의 운명을 설명하다 보니 애초에 책임자가 나에게 이해시켜야 했던 것을 내가 되려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해 사업 결과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이나 현지 직원들이 아니었다. 사업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지속가능성이라는 듣기 좋은 말이 얼마나 쉽게 뱉어지는지 몰랐다.     


지속가능성[持續可能性]: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환경과 생태계 또는 공공으로 이용하는 자원 따위를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적 또는 경제ㆍ사회적 특성 (우리말샘)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은 논리적 가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 내 자원을 투입하여 어떠한 효과가 나타나리라 기대하는 것인 만큼 본성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 여러 활동을 통해 시스템과 자원을 조직하고 지속가능한 장치를 마련해 놓는 것에는 무관심하다가, 사업 종료 시점이 다가와서야 추가 자금을 확보해주지 못하는 후원 기관들은 뒤늦게 지속가능성을 운운하며 발을 빼기 쉬웠다. 과정에서 게을렀던 책임을 뒤늦게 현지로 돌리는 격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수십 개의 활동 그 자체와 단기 결과물을 챙기기도 빡빡한 2, 3년 남짓의 시간 동안 현지에서는 나름대로 성급함을 부려가며 지속가능하기 위한 채비를 한다. 하지만 막상 현지 NGO나 지역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건 후원 기관의 펀딩 지속가능 여부였다.


“예전에 모 기관에서 사업을 지원했었는데 지금은 철수(Phase out) 했어요. 기관 전략적 결정에 따라서라니까 어쩔 수 없죠. 그 이후에는 사업이 없었어요.”
“그때 활동했던 사람들도 아직 이 마을 살기는 하는데, 지금은 지원받는 게 아예 없으니까 예전만큼 잘 못 모여요. 한창 훈련이나 보수교육 열심히 받은 공무원들도 지금은 다 다른 지방으로 가서 여기 없어요. 새로운 젊은 공무원들이 와서 다시 역량 강화 훈련 필요하고요.”


따뜻한 시선으로 A나라를 볼 줄 아는, 그래서 10년 가까이 그 나라에 머문 한 동료도 단호하게 보탰다. 사업 결과의 지속가능성이란 결국 자원의 지속가능성을 빼놓고는 달성하기 요원하다고. 쉽게 저버릴 수만은 없는 그럴듯하게 애정 어린 현실이었다.




사업 중에 지속가능한 토대 마련하기, 그러나


외부의 이니셔티브도 큰 기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대로 의존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사업기간 내 지속가능한 시스템 토대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무수한 지원 후 알게 되는 게 있다면 지속가능성은 결국 현지 거버넌스와 시스템이라는 큰 축에 기대어 있다는 것이다. 현지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고 지속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는 데는 정부와 지역 리더의 역할이 핵심이었다. NGO는 정부와 협력해 제도나 정책 수립뿐만 아니라 정책 실행에 필요한 예산이나 기술적 자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딜레마는 있었다. 지역공무원 고유의 업무 범위임에도 활동 경비를 지원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나마 활동비 명목의 일비를 지원하는 건 점잖은 방식이었다. 동료 기관들은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뒷돈을 쥐여 주어야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털어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에 쫓기어 속 타는 외국인 마음을 알고 일부러 승인을 지연시키거나 추가 자료 수집을 요구하는 등 일을 미루는 통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한, 주어진 돈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도록 책무성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는 한, 돈으로 해결하는 게 쉽고 빠른 길로 보였다. 그렇게 3년, 5년 혹은 더 오랫동안 이어진 관행이 오직 경제적 이득에 의해서만 움직이도록 현지를 물들이고 사람들을 부추겨온 것이 아니었을까. 닭이 먼저였는지 달걀이 먼저였는지는 분분할 수 있다. 일방적인 퍼붓기를 10년 정도 이어오다 지역의 자립을 위해서라며 또는 혹시 모를 부정한 결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며 떠나간 기관들이 남긴 건 빛바랜 약속밖에 없어 보인다.




사전에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그래도

 

사업 발굴을 위해 현장 조사를 할 때면 수많은 개발 기관이 현장을 들쑤셔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내에서 백 여킬로 떨어진 깊숙한 산골마을 캐비닛에까지 꼼꼼히 박혀 있는 각종 국제기관의 로고 발자국을 보고 있자면 과거 영광의 현장에 남은 잔해와 겹쳐 보였다.


제한된 기간의 사업이 끝난 이후에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투입물이 있지 않은 이상 사업의 성과가 100% 유지되기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여러 노력으로 체계화된 조직이 일부 기능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래도 사업 발굴, 기획, 수행 단계에서부터 가능성을 열어둔 채 현지 주민들과 동행할 수 있는 미션을 함께 나눈다면, 시작부터 책임을 분담한다면, 아니 시작 전부터 공동의 책임에 대해 같이 합의한다면 ― 모든 어려운 일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장기적인 계획도 없이 시스템이 정착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기에 예산 대비 효과를 말 그대로 뽑아내려다 주인의식과 현지주도개발을 방해한다. 사업 ‘종료 후’가 아닌 사업 ‘진행 중’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역동이 때로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보다 값지고 칭찬할 만하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걸까.   

  

바람직한 결과와 그럴듯하게 꾸며진 향후 계획보다 지금의 과정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담당 직원뿐만 아니라 관여된 모든 이해관계자가 결과보고 성과 대신 분기보고 과정에 조금 더 주목해 본다면, 바로 지금 주민이 하는 말에 호기심을 가져본다면, 과정이 끝을 돌볼 거라는 말을 믿는다면. 더 많은 것들이 지속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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