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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Nov 26. 2023

#2 치료와 예방

서비스와 옹호 그 사이에서

학교를 짓고 이양식을 할 때나 마을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헤어지지 않는 제복을 걸치고 위엄 있는 목소리를 장착한 이들이 늘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불편함이 그들에게는 잊을만하면 생각해 볼 만한 주제가 바로 가난이었을지도 모른다. 구청장 딸의 결혼식이 열리던 저녁에도 나는 비슷한 위화감에 잠겼다.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새어 나오는 텐트와 하객들의 외제차 행렬이 요란하게 도로를 채우는 동안 멀리 섬 마을에서 퍼지는 불빛이 유독 희미하게 일렁였다. 가난의 현장과 이를 다스리는 구조를 나란히 두고 보면 변화란 도무지 요원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끝과 끝은 한없이 펼쳐진 시간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들이 궁금했다. 매일 들여다보던 사업제안서는 대부분 일시구호물품을 전달하거나, 인프라 시설을 건축하거나, 인식을 바꾸는 교육 활동으로 짜여 있었다. 선배나 동료들은 그게 전부 인 것처럼 (혹은 다른 대안 없이) 제안서를 부지런히 복사하고 붙여냈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국제개발이 자선과 인도적 지원을 토대로 했기 때문일 수 있다. 큰 그림이나 가능한 옵션을 탐구하기보다 통상적 관례나 정형화된 모델을 따르는 게 안전하고 간편했을지 모른다. 동료들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보면 그 외 더 전수할만한 방법이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에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을 숫자가 아닌 장면으로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럴듯한 정답만 간편히 내놓지 않았는지, 애초에 사람들의 필요를 잘 공급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간과하지 않았는지 되물어보면서 말이다.




인식과 행동, 그 아래 뿌리 깊은 신념과 사회적 기대까지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은 길을 지나 도착한 산골 지역 주민들은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집을 옮겨 다녔다. 이 틈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출생 등록되지 않았다면 부모들의 인식이 부족해서라고 단순히 문제화할 수 있을까? 오랜 슬럼지역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어떤 이들은 죽음이 가까운 듯 한 노안을 하고 있어도 또렷한 눈빛과 민첩한 몸짓에서 생의 의지가 읽혔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아이에게 결혼을 장려하거나 생계 전선에 뛰어들게 한 부모는 자녀가 불행하기를 바라서였을까? 정부 시스템에서 소외된 계층의 부모들은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정보가 없거나 실제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개개인의 결정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지키고 나름의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저마다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누구든 생각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게 많지 않다. 생존을 위해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특성상 옛 선조들과 주변 이웃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규범적 기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결국 표면으로 드러나는 행동 기저의 인식과 핵심 믿음에 접촉하고, 이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을 촉진할 때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역과 공동체, 그리고 개별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특성을 깊이 배워야 했다. 어떤 활동을 기획하는 것 자체(what)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분석하여 접근하는지(how)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업 관리 기술이나 분야 전문 지식을 채우고 고도화된 평가와 위기관리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사람과 현장을 배우는 일이 우선이라는 오랜 선배들의 메아리와 닿아있는 지점이다.




한 끗 차이의 조작 Manipulation,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아는가?     


인식 개선뿐만 아니라 행동 변화에 있어서도 전략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 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1984>가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로 마무리되는 것을 해피엔딩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처럼,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전달하는 서비스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조작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출장 중에 ‘왜 개발을 해야 하느냐’고 동료에게 물었다. 동료는 적어도 ‘개 조심’이라는 글을 못 읽어서 물려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는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의 필요에 맞닿아 있지 않다면 한낱 기만과 조작에 불과하거나, 가진 자로서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반쪽짜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경계심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현금을 준다고 했을 때 흔히 우려하는 것처럼 마약이나 술 중독에 빠지는 비율은 생각보다 적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잦은 빈도로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변화를 목표로 삼는다. 우리는 어쩌면 조건을 달 필요가 없었다. 인간적 신뢰가 유일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믿을만해서 믿어준다기보다 어떤 순간에도 지지를 보내는 것. 누군가의 최상의 이익(Best interest)을 우리가 대신 결정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건 주민주도의 개발을 꿈꾸는 사람들의 숙제일 것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은지 대신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도록 직접 묻고 듣는 게 변하지 않는 시작점 일지 모른다.




권력에 대한 저항과 재구성     


우리가 하는 사업에서는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넘어 시스템의 변화를 위한 운동도 그려볼 수도 있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차 농장과 오리 떼가 거니는 습지대는 겉보기에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실상을 안 것은 차 농장을 운영하는 농장주와 지역 리더들을 만났을 때였다. 인도의 일부였던 그 지역은 200여 년 전 별도 화폐를 사용할 정도로 외부 경제와 단절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소작농으로 종일 찻잎을 따면서 보냈다.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이방인으로 눈초리 받으며 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지역에서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겠다고 하는 건 농장주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세상에 눈을 뜨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면 농장 운영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확히 존재하는 긴장 속에서 내 옆의 현지 직원은 설득력 있는 얼굴로 농장주를 대면했다. 무언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진심 어린 용기로 마주했을 때, 그를 대척점에 두기란 어려웠다. 그렇게 농장주와 지역 리더의 허가를 받아 5년 간 장기 교육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죽 염색터에서부터 고무 슬리퍼를 찍어내는 골방까지 아이들을 고용하는 다양한 사업장의 고용주들과 대면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고용주와 당장 손에 쥐고 갈 돈이 필요한 아이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모든 고용주들을 쫓아다니며 아이를 해고하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고용주 조합을 만나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과 어떠한 폭력이나 불법적 착취도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좋은 의도에 동의해 주는 사업주들의 힘을 얻었다. 그 밖에도 정부를 대상으로 해로운 유형의 아동 노동을 금지하기 위한 법 개정 운동과 대중 인식개선을 위한 영화제작을 계획했다. 권력의 불균형에 대한 변혁적 움직임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게 된 또 다른 찰나였다.




과정이자 목표로서의 옹호     


개발의 효과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옹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법 개정이나 정책실행과 같은 정치 밀착형 활동부터, 의무이행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기관이 힘을 합쳐 꾸리는 연대 활동, 증거 마련을 위한 연구조사, 일반 대중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캠페인 활동까지. 종국에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까지 바라보면서, 옹호는 개발의 과정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들이 근본적 변화를 촉진하는 행동들이 된다. 당장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도주의적 접근과는 다르게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들어간다. 특정 상황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불편부당Impartiality이 아닌 중립Neutrality을 지킨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도록 지지하는 것이 결국 정치가 아니면 무얼까. 개인의 삶을 응원하는 것이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모든 사람은 결국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그동안 서비스 제공은 치료와 사후 대응적 의미로, 옹호 활동은 예방과 선제적 의미로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서비스 지원은 대응책이자 예방책일 수 있고 옹호도 마찬가지다. 마치 끝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끝과 끝은 느리다. 하지만 끝과 끝은 그 무엇보다 빠르기도 하다.



같이 보면 좋을 책 -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 (2020).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김승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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