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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Mar 17. 2024

#4 의도한 성과와 의도치 않은 변화

로그프레임과 매트릭스 너머

새로운 시공간을 만나면 이루지 못할 꿈을 바라보기도 한다. 연초에는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어보다가, 연말이 다가오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며 나의 발자취를 격려해보기도 한다. 계획한 일을 부단히 노력해서 이룬 경우와 계획하지 않았지만 예상 밖의 긍정적 영향을 이끌어낸 경우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뛰어난 성취였다 쉽게 가려낼 수 있을까? 반듯하게 짜인 네모 안에서는 목표로 삼았던 것에만 왕관을 수여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삶과 우리를 둘러싼 맥락, 그리고 그 사이의 역동은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고 마치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만 같다.




삶을 아우르는 일관된 논리란


취업 시장에 던져지기 전 자의 반 타의 반 경제학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정보와 지식을 가진 합리적 개인은 비용 측면에서 유리한 결정을 내린다는 기본 전제에서 나아가기 어려웠다. 전체 사회는 둘째치고 나부터 흔히 ‘가심비’에 진심인 비합리적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합리적인 선택이 꼭 나에게도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뿐더러, 결국 확률에 근거한 경향을 말하는 거라면 불완전한 파편에 논리를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경제학을 가까이하지는 않으면서 가끔 분별력 있는 어른인 척하고 싶을 때 어색하게 만나보는 친구처럼 대했던 것 같다. 인간의 예측불가한 행동 양상을 파헤치는 행동경제학은 그나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듯했지만, 인간의 삶을 수학 공식처럼 하나의 논리로 수렴시키기는 여전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국제개발 사업을 진행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게 되는 논리적 틀이 있다. 일명 로그프레임Logical framework 또는 변화이론Theory of Change이다. 일정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해 활동을 수행하면 즉각적 결과물이 나오고, 그 결과물이 모여 목적 달성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한다. 개입에 대한 논리적 흐름 또는 개입을 통한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다. 설계대로 진행되었는지 평가하는 도구들도 사업을 마칠 때까지 손 놓지 못한다. 로그프레임과 평가 매트릭스는 사업의 핵심을 압축해 보여주면서 가야 할 지향점을 계속 상기시키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지만, 내가 경제학과 맺었던 그 어색한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출처: Tools4dev)



나는 왜 평가를 맹신하지 않게 되었나


도구는 본래 제한된 소임에 충실할 뿐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재단한 목표에 몰두해 그것만 볼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다 보면 사업의 각 활동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수적인 것처럼 무시되기도 한다. 로그프레임 안에 들어온 이야기에만 동그라미 정답 처리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관계’와 ‘동기’는 일의 성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자원이자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지만 제안서 안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사업 모니터링이나 평가를 할 때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협조나 일하는 사람의 기지가 목적 달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게 보였다. 지역주민들을 잘 아는 네트워크가 금전적 자원만큼 중요했고, 직원들의 근속연도는 그들의 역량만큼 사업의 성과에 핵심적이었다. 대학원 공부를 마친 타 지역 출신 직원보다 해당 지역 지리와 사람들을 오래 알아 온 그 지역 출신 직원이 더 잘, 더 오래,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업 기획과 평가 과정에서 이런 부분이 간과되기 쉬웠다.


언젠가는 체계적인 사업의 논리모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성과를 평가하는 일 자체가 가장 중요해 보이는 때도 있었다. ‘빈곤의 덫을 걷어차기’ 위해서는 고집스럽게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에 설득되었고, 압둘 라지프 자밀 빈곤퇴치연구소Abdul Latif Jameel Poverty Action Lab(J-PAL)의 일에 감명을 받아 영향평가를 알아가기도 했다. 그럴수록 모순적이게도 내가 있는 현장의 진짜 이야기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경우 불완전한 자료와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 분석 과정에 있었다 ― 엄밀히 말하자면, 소위 서양에서 온 과학적 방식과 기준에서 말이다.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니터링과 평가를 주도한다고 했을 때, 현장과 사업과 지역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니 정보의 범위나 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인 평가까지 가지 않더라도, 후원자의 현장 방문 일주일 전 부리나케 최상의 모습을 꾸며내는 상황은 차마 피할 수 없이 흔하게 재현됬다.


피상적이고 때로는 왜곡된 정보 일지라도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는 노력은 인정하면서도, 평가의 역할은 개인적으로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로그프레임과 매트릭스 너머    

  

방글라데시에서 영유아교육 시범사업이 끝나고 종료 평가를 진행했을 때 현지 직원들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말은 ‘로그프레임 너머Beyond logframe’였다. 계획했던 활동 외에 지역 협력기관과 주민 스스로 이루어낸 추가 결과들 때문이다. 함께했던 직원은 자기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빠르고 힘 있는 톤으로 털어놓았다. 부모들과 자원활동그룹을 조직하고, 영유아센터 출석률 모니터링을 위한 청소년 모임을 만들고, 사업지역 아동권리 상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영유아센터 건축을 위해 주민들이 땅을 기부하고 울타리 설치와 보수작업 같은 활동을 함께했다고. 사업이 마중물 되어 지역이 조직화되자 더 큰 변화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우리는 어쩌면 의도한 것보다 서로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걸 실감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교훈은 의도치 않은 변화의 주체가 현지 직원과 주민 스스로였다는 점이다. 사업을 문서에 적힌 대로만 이해한 것이 아닌, 활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닌, 본인에게 내재화된 아동권리에 대한 인식과 아동을 대하는 태도가 사업 전반과 활동 과정에 녹아든 것이다. 개념을 익히는 것은 인지기능인 기억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섬세한 창의력을 추가로 필요로 한다. 아동권리 적용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인사가 만사라는 닳고 닳은 말을 또다시 떠올렸다.

   

일관된 방식으로 사업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최소한의 표준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활동 하나와 그 과정에서 맺는 섬세한 관계 한 줄에서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것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틀에 짜인 구조를 넘어 사업의 무대가 되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 자체와 역동을, 그리고 사람의 존재를 바로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단일 사업에서의 성과 측정뿐만 아니라, 조직의 책무성(accountability) 관점에서 성과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가능한(accountable) 상태로 축적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필수 과업이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동력을 유지하기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모양새다. 책무성을 지킨다는 게 반드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현지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과 신뢰’를 책무성과 정반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인도주의와 인류애로 포장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방치하는 대신, 장기적이고 비가시적인 노력에 대한 가치 부여와 부가 설명을 성실하게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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