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호수에 비해 온타리오 호수는 언제나 잔잔한 편이다. 지난 3월엔 얼음으로 뒤덮여 얼어붙은 모습으로, 9월엔 물결이 부드럽게 해안선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얀 요트들은 마치 잠든 새처럼 고요히 떠 있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풍경 속, 회색빛 돌담으로 둘러싸인 묵직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었다. 바로 킹스턴 교도소(Kingston Penitentiary)다. 1835년에 문을 열어 2013년까지 운영된,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감옥이다. 이제는 문을 닫고, 사람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억의 박물관’이 되었다.
여름에만 개장하는 곳이라, 지난번엔 헛걸음을 했지만 마침내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90분 동안 걸은 그 짧은 시간이, 내가 생각하던 ‘자유’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투어는 여러 명의 해설가와 함께 했다. 그들은 모두 이곳에서 수십 년을 근무한 전직 교도관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기억과 감정이 섞인 이야기의 온도가 담겨 있었다.
좁은 복도와 차가운 철문, 그리고 한 사람만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독방... 그 벽에는 오래전 누군가가 새긴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사람이다.”
그 글씨를 보는 순간, 한참을 서 있었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잊히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그 마음이 벽을 뚫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사실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진 킹스턴 교도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나 아는 지식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1971년에 있었던 사건은 마치 한 편의 범죄 영화 한 편을 본 듯 생생했고, 동시에 마음 아픈 사건이었다. 그해 봄,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우리를 사람답게 대해 달라”라고 외쳤다. 6명의 교도관을 인질로 삼아 더러운 환경, 부족한 음식, 폭력적인 처우에 항의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죄수들은 폭력과 잔인함으로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교도관은 목숨을 잃었다. 누구도 완전히 옳지 않았고, 또 누구도 완전히 그르지 않았다. 죄와 처벌, 권력과 저항, 침묵과 폭력... 나눠놓으면 서로를 부정하는 단어들이지만, 한 장의 물 위에서 보면 모두 같은 파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4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의 폭동 이후, 캐나다의 교정 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감옥은 사람이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회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어쩌면 그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 킹스턴이었는지도 모른다.
투어의 마지막, 가이드는 한 문장을 소개했다. “The degree of civilization in a society can be judged by entering its prisons.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은 그 사회의 감옥을 보면 알 수 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우리는 흔히 문명을 건물의 크기나 기술, 부로 종종 판단하지만 진짜 문명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오래된 통찰이었다. 킹스턴 교도소는 바로 그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호수 빛이 한결 밝았다. 철문과 수면 사이—철문 안의 차가운 공기와 호수의 바람이 섞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마무리할 때 늘 “다음”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날은 예외였다. 다음 목적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바람은 자유롭게 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름들이 그 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고 지나쳤던 경계, 귀담아듣지 않던 낮은 목소리, 발아래 잠들어 있던 타인의 시간에서 사람의 마음과 사회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쇼윈도 같은 여행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반짝이는 전경을 모아두고, 그 위에 나의 감탄사를 붙이는 방식. 중년이 된 지금, 풍경의 뒤쪽, 부피가 있는 이야기들에 손을 뻗고 싶어 졌다. 아름다움은 종종 침묵을 통해 오고, 이해는 대개 불편함과 함께 온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껴안는 것에서 자란다는 것을 느끼는 여정이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