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동지(?) 남편이 있는데 왜 더 화가 나지?
어제는 역대급으로 화가 난 날이었다. 오전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괜찮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첫째가 오랜만에 모래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매일 출근도장 찍던 모래놀이터에 아빠가 휴직한 뒤로는 오히려 잘 못 가게 되었으니 가고 싶을 만도 하지(아빠 휴직 후에는 거의 매일 워터파크, 동물원, 어린이박물관, 수목원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놀이터에 갈 시간이 없었다..;;). 여기까진 전혀 문제도, 화날 일도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거였다. 모래놀이터를 '엄마 말고 아빠랑만' 가고 싶다는 거였다. 첫째가 영특한 아이이긴 해도, 아직 32개월밖에 되지 않아 성향 파악이 안 될 때가 있나 보다 싶었다. 왜냐면, 아빠는 놀이터, 그것도 모래 놀이터는 절.대 가지 않을 사람이니까.
과거를 줄줄이 끄집어내고 싶진 않지만, 아직까지도 한이 맺힌(?) 게 있다. 당시 18개월(그 유명한 재접근기!)의 첫째를 키우던 나는, 동시에 둘째 출산을 앞둔 막달 임신부였다. 하지만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기에, 한창 바깥 활동에 재미를 느끼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던 첫째의 에너지 소모와 호기심 충족을 돕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평일엔 어른이 나밖에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말은..?
솔직히 나 같으면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남산만 한 배를 앞세우고 뒤뚱뒤뚱 다니는 모습을 보면 놀이터라도 내가 가겠다 하고 가줬을 것 같다. 그리고 36주부턴 언제 출산해도 이상하지 않고, 심지어 경산모는 더 빨리 출산할 수 있다는 산부인과 원장님의 경고(!)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니가 못 가면 그냥 놀이터 안 가면 되는 거 아니냐. 왜 내가 가야 하냐?' 오로지 이런 스탠스로 일관했다.
결국 내가 계속 놀이터에 갔었다. 아이 아빠가, 아이가 그렇게 밖에 나가 놀고 싶다는데, 그리고 와이프는 배가 남산만한데, 그거 한 번 나가 노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런데도 '내가 왜!'를 외치며 집에만 있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정말 서운했다. 나는 그 흔한 입덧도 안 했고(물론 새벽 2시에 '이거 먹고 싶으니까 당장 사와!' 이런 것조차도 전혀 없었다), 임신기에 출혈 같은 작은 트러블조차 없었고, 배에 튼살크림을 발라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매일 남편의 요청으로 남편 등을 긁어 줬다. 임신부가 이렇게 얌전(?)해서 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었으면, 그 에너지를 아이에게 좀 쏟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만삭일 때 남편이 요리를 가끔 하긴 했다. 주중에 먹을 아이 반찬이라든가, 주말에 우리가 먹을 것 등. 이걸 언급하지 않으면 남편은 나의 모든 말을 부정하고 자기를 그냥 나쁜 놈으로 몰아가기만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전담한다고 생각하는) 요리는 순간이고, 육아는 아이가 잠들기 전까진 계속되는데 어쩌나. 그리고 팩트는, 요리(특히 아이 반찬)도 내가 할 때가 훨씬 많았다는 건데.
그때부터 나는 남편을 '놀이터 안 가는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요즘 뭐든 '엄마 아닌 사람'에게 해 달라고 하길 좋아하는 첫째에게(할머니랑 있으면 뭐든 '할머니가 해줘!', 엄마 아빠랑 있으면 '아빠가 해줘!' 시전) 아빠는 '놀이터 안 가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남편은 놀이터에 가겠다고 해 놓고 결국 안 갔다. 10분만 낮잠 자고 간다고 해서 내가 10분 알람을 맞춰 줬더니, 그냥 끄고 2시간을 잤다. 이때부터 화가 났다. 차라리 나간다고 말을 하질 말든가. 아이랑 약속을 해 놓고 저러는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다.
2시간 후 시가 전화가 와서 깨더니 '시간이 늦었으니까 기차놀이나 하자'고 소파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물론 첫째는 놀이터에 가겠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랬더니 '그럼 둘째랑만 기차놀이 해야지~' 하면서 기차놀이를 하겠단다. 이제 걸어 다니며 언니가 하는 건 자기도 뭐든 다 하려는 둘째에게 애정과 질투를 갖는 첫째의 심리를 자극하는 거다. 엄마인 나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저런 얄팍한 수를 쓰는 모습을 보니 더 화가 치밀었다. 심지어 이미 밖에 나갈 옷까지 다 갖춰 입은 첫째를, 둘째에 대한 질투를 이용해 잡아 앉히려는 얍삽한 수. 결국 내가 첫째를 설득했다. 아빠는 절대 놀이터 안 갈 거니까 그냥 엄마랑 가자고. 놀이터에 많이 가고 싶었는지 첫째가 나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나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보통은 이렇게 해서 밖에 나오면 기분이 좀 풀리고 좋아지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화 덩어리가 떡처럼 철썩 달라붙어 내려가지 않는 같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순간 첫째가 '자전거 탈래~' 하며 트라이크를 가리켰을 때 1차 폭발할 뻔했는데 겨우 참았다.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 자전거를 타고 간다니, 싶었지만 이런 걸로 화낼 거면 차라리 밖에 안 나가는 게 낫다고 되뇌며 화를 눌렀다. 하지만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와서 타려는 데 '안전벨트 아직 안 했잖아!' 하는 첫째에게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냥 일단 타!' 하고 거칠게 엘베에 태우고, '장갑도 안 꼈네~' 하길래 '나중에 껴!' 이랬다.
오후 5시였는데도 밖은 따뜻했다. 하지만 첫째는 '손 시려~ 이러다 동상 걸리겠어. 장갑 낄래!' 하며 굳이 장갑을 껴 달라고 했다. 장갑 입구를 벌려 줬더니 '음 근데 아빠는 이렇게 벌리지 않더라고~' 이러면서 벌리지 말고 잡고만 있으란다. 그 순간 2차 폭발할 뻔했지만 소리는 지르지 않고 '첫째야, 엄마 지금 화가 났으니까 사사건건 시비 좀 걸지 마'라고 말했다. '시비가 뭔데?' 라는 말을 들으니 내가 지금 32개월밖에 안 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란 반성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데도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눈치 빠른 첫째가 계속 '엄마 이제 화 풀렸어? 엄마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하는데도, 예전처럼 웃으면서 '응 이제 다 괜찮아졌어~' 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늘 새벽, 첫째가 갑자기 깨더니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해 달랬다. 그러더니 중간에 '엄마가 어제 장갑 나중에 껴! 해서 손 시려서 동상 걸리는 줄 알았어~' 라는 거였다. 또 '우리 어제 억지로 이마트 갔어. OO이가 이마트 가고 싶다고 울고 그랬잖아. 그래서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랑 다 같이 갔어'(이마트 에피소드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했는데, 아빠랑 이마트 갈 거라고 울고 불고 했었다) 라는 말도 했다.
평소 잘 깨지 않는 아이가 중간에 깨서 저런 말을 했다. 나의 그 평소답지 않음이, 화난 모습이 첫째에게 좀 충격이었나 보다. 그렇잖아도 첫째가 자기 전에 나름 혼자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던 나인데, 그걸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첫째의 이런 말 때문이었다. 아이는 아무런 평가나 감정 없이 본인이 본 사실 그대로를 얘기했지만, 나에겐 그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래서 써 봤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니, 아예 안 일어나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그 강도나 빈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나는 왜 화가 나는가? 주로 어떤 때 화가 나는가? 그렇게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우선 나는 내가 육아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있을 때, 남편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남편의 행동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남편이 직장에 다닐 때는 주말에 집에서 쉬고 싶나 보다, 나이가 많아 더 피곤한가 보다, 라고 애써 포장을 했었다(물론 나는 복직하면 저러지 않을 거다..). 하지만 단기휴직을 한 지금도 저러고 있는 모습이 분노를 넘어 좌절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그런데 남편은 바뀔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내 관점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내 행복을 남편의 손에 저당 잡히고 싶진 않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이 나랑 첫째가 집 안에서 1:1 데이트를 실컷 할 기회를 주는 거다'. 남편이 오전 내내 방에 처박혀 컴퓨터나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가 슬렁슬렁 나와서 점심을 차리고, 그 이후 고생한 본인의 공치사를 오지게 하며 세 시간 동안 낮잠을 자더라도 그냥 저렇게 생각하는 거다. 실제로 오늘 바로 저 새로운 관점으로 남편의 행동을 바라봤더니, 남편이 선사해 준 나와 첫째 또는 나와 첫째&둘째의 1:1, 1:2 데이트 기회에 예전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아주 성공적이었다.
2. 나의 문제는 이렇게 남편 때문에 화가 난 걸 주체를 못 하고 애꿎은 아이에게 표출할 때가 있다는 거다. 최대한 안 그러려고, 그런 악의 고리를 의식적으로 끊어내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게 나갈 때가 있다. 그럼 첫째는 '엄마 너무 거칠게 말했어.. 엄마 너무 무섭게 말했어' 하며 훌쩍인다. 그럼 또 반성하고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엔 첫째에게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과해야 한다.
어제는 잘 넘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 내가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되어서 첫째를 잘 대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새벽에 다시 사과하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엄마가 어제 거칠게 말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화가 났을 때, 앞으로는 전에 책에서 봤던 것처럼 열까지 세고 심호흡을 해야겠어.' 그랬더니 첫째가 '응 엄마, 열까지 세고 호흡 좀 가다듬어~ OO이도 화나면 그렇게 할게~' 했다. 'Sophie 책에서 본 것처럼 달리기 대신 OO이는 자전거 탈래!' 라는 말도 했다. 32개월인 아이가 나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나의 행복,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남은 내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이 바뀌면 일상이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 바뀐 관점이 체화된 나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우리 아이들도 일상에서 관점을 바꾸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