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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

아낌없이 퍼주는 친구 이야기

by 나얀


때로는 우연히 만난 사람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15년쯤 지난 지금, 미국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친구가 생각난다.


처음 그 친구를 만난 건 친한 한국인 언니를 따라 간 현지 교회에서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순간 한 줄기 햇빛이 그의 얼굴 위로 내리쬤다.

마치 신의 선택을 받은 천사라도 된 것처럼.

그 순간부터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친구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매주 그 교회에 갔다(그때만 해도 난 무교에 가까웠는데도).

외국인은 나와 언니밖에 없었기에, 여러 미국인 친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필요한 건 없는지 챙겨주었고 자연스레 그와도 말을 트게 되었다.

전화번호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전날 교회에서 들려왔던 노래 제목을 묻는 나의 문자에 단답형으로 딱 제목만 말해줬던 그 친구의 답문이 생각난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친구가 먼저 문자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 너른 땅에서 차도 없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 친구는 항상 언니와 나를 같이 챙겨주었다.

소통 창구는 나였다.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하면 나는 언니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같이 갔던 마트에서 산 생필품이 떨어질 무렵이면 기가 막히게 연락이 왔고, 생수처럼 무거운 물건을 사면 방까지 들어다 주었다.

헤어질 땐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이 자동응답기처럼 그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친구는 나의 아이돌, 나의 최애였다.

그가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수락한 날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는 게 내 하루 일과가 될 정도로.

하루는 도서관에서 또 그의 담벼락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향해 오는 것 같아서 황급히 화면을 바꾸고 돌아봤더니 그가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연락의 빈도는 점점 잦아졌다.

몇 개월 뒤엔 마트 갈 때는 물론, 교회 행사가 있을 땐 자기가 데리러 올 테니 기숙사에서 기다리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주고받았던 말을 기억하고 이곳저곳에 같이 가 주었다. 예를 들면 학교 피트니스센터 같은 곳.

내가 거기 운동기구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지나가듯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언니와 내가 심심할까 봐 기숙사 1층에 있던 게임 룸에도 와 주고, 같이 수영장도 가고 라켓볼도 치고 농구경기도 보러 갔었다.




그 친구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주는 것 없이 참 많은 걸 받았다.

한국 밥이 그립다는 내 한 마디에 그는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의 한국식당에 데려가 주었다.

거기서 농담 삼아 "너 키아누 리브스 닮았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아?"라고 했더니(그 친구를 처음 본 순간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좀 듣긴 했는데, 난 브래드 피트가 좋아"라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난다.


또 동물원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본가 근처에 아주 큰 동물원이 있다며

크리스마스 즈음 다른 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나와 언니, 다른 오빠를 초대해 1박 2일간 머물게 해 줬다. 차로 5시간 정도 걸리는 그 집에.

그 친구의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미국인들의 눈에, 우리는 낯선 나라에서 명절을 쓸쓸히 보내는 이방인이었으니까.

그 친구와 그의 부모님은 이국땅에서 홀로 명절을 보내는 우리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내어준 것이다.


낮에 동물원에 들렸다가 저녁엔 그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친구의 부모님도 정말 따뜻하신 분들이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집밥을 먹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나에게 정말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이 정도로 친절하고 고마운 행동을 하는 일이 또 있을까?‘라고 생각할 만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우리를 다시 학교로 데려다준 후, 그 친구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하룻밤을 머물렀다.

꼼꼼하게 집 청소를 마친 후, 그 친구는 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프린터 사용법부터 컴퓨터 비밀번호, 옷장 속 프리 티셔츠의 위치, 음식이 있는 곳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적어 보낸 뒤 아파트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기숙사는 방학 때 불편할 테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 아, 책상의 얼룩은 청소하다 생긴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이런 내용의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다(심지어 이 뒤에도 훨씬 긴 내용이 남아 있음). 다시 봐도 너무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면 그 친구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 이상의 사이로 발전한 적이 없었다.

내 입장에서, 그는 ‘아낌없이 주는 (정말 잘생긴) 나무’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다정하고 멋진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게 가능할까? 아니, 그게 가당키나 할까?’

라는 생각이 항상 기본으로 깔려 있었기에 우리가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그 친구의 입장은 더욱 애매하다. 그렇지만 추측을 해 보자면,

나는 애초에 미국에 1년 간만 머무르기로 한 사람이었기에, 그도 딱 그만큼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라는 틀 안에서, 1년간 성심성의껏 잘해줄 만한 상대.


물론 나는 그런 상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이돌과 친해진 팬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처음엔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친구가 갈수록 점점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편한 존재가 되어갔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미국이 그리울 것 같다’고 하자 ‘그냥 내가 그리울 거라고 해’라는 말도 자연스레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 4시, 그 친구 차 조수석에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다른 친구들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친구와 포옹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다, 한 번 더 뒤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친구의 앞에선 절대 울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만큼 꾹꾹 눌러 참았기에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아무리 내가 미국에 놀러 간다고 하고 그도 한국으로 온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에.

다른 교환학생 친구가 나에게 인사했듯 이 작별이 ‘Goodbye forever’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인사해 본 적이 있다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릴 때 그와의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 친구는 카톡까지 깔며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내가 피아노로 연주하던 이루마의 곡이 카페에서 들려온다거나, 본가에서 봤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거나 하는 소식들을 알려주었다.


그러다 점점 연락의 빈도가 줄어들었고, 15년이 지난 지금은 각자 결혼해서 잘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얼마 전에도 그가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남기고 간 담요를 이제 강아지 이불로 쓰고 있다며 인증샷을 보낸 것이었다.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담요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는 사실이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했다.


나 역시 그에게 진심을 담아 답장했다. 그 담요를 버리지 않고 아직 사용해 줘서 고맙다고, 건강히 잘 지내라고.



우리는 연인도, 가족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미국 유학 생활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그 친구가 등장하는 것처럼, 그 친구는 내 인생의 한 장을 아름답게 장식한 특별한 존재로 남아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준 그 친구에게 다시 말하고 싶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 그 기억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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