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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

전도사모님(전도사님+사모님)

by 작꾸천치

미국 생활 초창기, 가장 좋았던 것이 일요일 날 교회를 안 가도 눈치를 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일요일 날 온전히 하루종일 퍼 자도, 줄어드는 은행잔고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아르바이트를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던 것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자유와 방종이 보란 듯이 공유하는, 아니 그 사이 어딘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나.




3대째 기독교 집안에, 아버지는 30살 중반에 장로가 되시고, 어머니는 뭐 당연히 집사님에서 권사님이 되셨고. 더군다나 난 무남독녀 외동아들. 그러기에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부모님 두 분의 4개의 눈님들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혹시라도 버릇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 분 모두 엄격하셨다. 교회 관련된 일은 더더욱 엄격하셨다. 그러기에 주일날 교회 안 가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뭐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또 무남독녀 외동아들이기에, 형이나, 누나, 동생이 없다는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실망을 안겨 드리기 싫어, 묵묵히 싫으나 좋으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이나 낮이나, 교회를 우리 집 안방인 마냥 터전으로 삼고 자라왔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주어진 자유인만큼. 하지만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주머니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들어오는 족족 나가는 돈을 보며, 주말은 달콤한 데이트로 없는 돈을 탕진하는 대신에, 알바를 했다. 그러다가 쉬는 주말이면, 종교가 없던 여자친구를 데리고 교회에 갔다. 예배도 드리고, 같은 청년들과 시간도 보내고, 무엇보다 점심이 따뜻한 밥과 국이었기에.


그렇게 믿음과 신앙은 뒷전인체, 집사님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일요일 점심이 나의 신앙이고 믿음으로 굳어 가던 중, 청년부를 담당하실 새로운 분이 오신다고 한다. 어라..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이신대, 연세가 있으시네. 좀 많으시네. 대충 봐도 50대 초, 중반. 이거 뭐 세대 차이로 대화가 제대로 되겠어. 유학생의 고충을 아시겠어.




첫인사를 드리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예상했던 외모와 목소리가 아니다. 반백년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오심을 알 수 있는 외모, 단호함이 묻어 있는 친근함, 따뜻함, 인자함이랄까. 악수를 하는데 이상한 전율이 느껴진다. 뭔가 있다. 있어.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매주 이어지는 청년부 모임. 난 당연히 가지 않았다. 나의 신앙이요, 믿음인 점심이 해결되었으니,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청년부 모임에 오라고 하신다. 모든 것이 충분치 않고, 부족했던 유학생인 난 오라고 하면 또 잘 간다. 떡 하나 더 얻어먹으려고. 그건 나의 생존과 은행 잔고와 직결되니까. 또 점심 먹고 딱히 갈 데도 없고, 집에 가 보았자, 집이라고 해도 방이 3개인 아파트에 4명이 사는, 나는 그중에 부엌 옆에 나무로 벽과 문들 달아 거실을 쓰고 있었으니, 집이 주는 안정감, 평안함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를 오직 기다리는 건 4마리의 햄스터뿐이니. 오후 3시였던 모임에 참석을 하기 시작하며 듣게 된 두 분의 이야기.




그 당시 전도사님은 한국에서 교사로 30년 가까이 근무를 하시며, 교사 선교회를 섬기시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니 굳이 왜? 두 분이 교사로 30년 가까이 근무를 하셨는데, 그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하고, 굳이 왜. 더 충격적인 건, 신학교는 교회 근처가 아닌 LA. 주중에는 신학교로, 주말에는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으로. 매주 그렇게 LA와 샌프란을 왕복 12시간 넘게 운전하시며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한다. 충격이었다. 굳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그냥 LA로 이사하시면 편하실 텐데. 그 연세에 왔다 갔다 하시는 거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새벽기도에 참가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있으면 그 새벽에 라이드도 해 주신단다. 심지어 그 이른 새벽시간 트래픽이 없을 때도 왕복 1시간이 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까지 하시는 건지. 그분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궁금증과 의심과 또 뭐 좋지 않은 것들을 싹 다 마음에 품은 체로 모임에 참석을 했다. 한주, 한 달, 두 달, 세 달, 일 년.... 그동안 철통같이 닫혔던 나의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걷잡을 수도 없이, 뜸이 다되어 가는 밥통과 압력 밥솥에서 나오는 강력한 수증기처럼 나의 생각과 고집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며 터지기 시작했다.




지루했던 설교시간, 그러기에 더더욱 안성탕면이었던 단잠의 시간들이 변하여,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눈앞에 사슴들이 기쁘게 펄쩍펄쩍 춤을 추는 듯 살아 역동력 있게 움직였고, 그 중심에 환하게 웃는 내가 있었으며, 그동안 방황했던 미국에서의 삶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나의 신앙과 믿음의 버팀목이었던 주일점심인 따뜻한 밥과 국은 더 이상 마음속에 설 자리가 없었다.


그 대신에 청년들을 위하여 에수님의 흔적을 삶으로 행동으로 실천하시는 두 분의 헌신, 우리를 향한 한 없는 끝없는 두 분의 섬김, 무엇보다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두 분의 사랑이 우리들 마음속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매월 마지막 주 생일 파티를 위해 집으로 40명 가까이 되는 청년들을 초대하여, 부족함 없이 정성만이 가득했던 저녁식사 시간, 생일 파티를 하며, 서로를 사랑으로 두 팔 벌려 축복하고, 격려하고, 위로했던, 이 땅에서의 천국과 같던 시간들 모두, 우리에게 조건 없이 보내 주셨던, 전도사님과 사모님, 이 땅의 작은 예수 두 분이 계셨기에 가능했었다.




모태 신앙이었던 나는 태초에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의지를 쓸 기회도 용기도 없이, 그냥 그렇게 모양만 있는 형식만 있는 그 걸 또 흉내를 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두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삶으로 일상으로 묵묵히 청년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신 전도사님과 사모님 덕분에 원망만 가득했던 모태 신앙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고, 수천만 년 전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의지를 마침내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하여, 그 분과의 첫사랑을 회복함과 동시에, 거듭남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 속에, 하루하루 은혜 가운데 살아가며, 그것을 나누려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이 글이 올라갈 때쯤, 미국 시간으로 오늘 몇 시간 후, 한국 시간으로 2월 14일 오전 10시, 잠시 미국을 방문하시는 두 분과 11년 만에 이루어지는 이산가족 상봉, 가까이 살지만 마음속에만 품고 자주 만나지 못했던, 그 당시 함께 했던 형제, 자매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과 온 식구가 함께 할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마음속에 가지고만 있었던 추억을 깨지지 않게 하나씩 조심스레 꺼내어 보며 함께 울고 웃을 시간들.




이제는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내로, 그 당시 풋풋함과 젊음은 아래와 같이 사진 속과,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겠지. 하지만 오늘의 만남이 그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서로 자랑하며, 우쭐대는, 더 이상 인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40-70대 우리들의 흰 머리카락 환장파티가 될지라도 좋다. 그냥 좋다. 오늘의 시간도 앞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넣어둘 귀하고 소중한 축복의 만남,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될 테니까.

어서 빨리 보고 싶습니다. 전도사모님.

에덴의 형제들.jpg 2014년의 소중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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