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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깊은 사유와 성찰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글

김기석, <최소한의 품격>

by 비키언니







7쪽


희망은 거대한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묵묵한 행동 속에서 싹튼다. 우리가 불온함을 잃지 않고, 기다림이 아닌 행동을 선택할 때,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41쪽


삶의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자각이었다. 실패와 고통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심연의 가장자리로 떠밀려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검질김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47쪽


희망은 있는가? 희망은 외부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희망의 뿌리는 사실은 우리 속에 있다. 어쩌면 희망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75쪽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조형예술가인 클로디 윈징게르는 <내 식탁 위의 개>라는 책에서 기쁨을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쁨이란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찾아오는 섬광과 같으며, 때로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예외 없이 스며든다고 설명한다.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87쪽


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다. 혐오와 분열과 배제의 말과 몸짓에 휩쓸리지 않고 온몸으로 어둠과 맞서 빛을 만들고, 친절함으로 세상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세상의 희망이다. 자기 속의 얼음을 녹여 생명을 싹튀우는 이들이 더욱 그리운 시대다.











102쪽


자기중심성은 뿌리가 깊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길이 아주 없지는 않다. 사람은 가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사랑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사랑은 자기를 초월하게 한다. 고립감을 털고 일어나 일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우리 속에 불어넣는다. 사랑에 사로 잡혀 사는 이들이 있다.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벗이 되어주고, 그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말이다. 사랑을 가시화함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는다.











118쪽


산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상황의 요구에 응답함을 통해 성숙해진다. 신앙생활이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이웃이 되라는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이웃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익숙하고 친숙한 세계에만 머물 때 삶은 진부해진다. 떠남은 위태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142-143쪽


서로를 돌보고, 슬픔을 가볍게 쫓아버리고, 농담을 받아주고,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서로를 띄워주는 사람들의 그물망이야말로 이 위험한 시대를 견디도록 하는 힘이 아닐까?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서로에 대해 책임지는 삶을 살고, 그 과정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의 비결이 아닐까?











156쪽


저마다 지고 가는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 아우성을 친다. 권태와 무력감은 우리 일상을 무채색으로 물들여 시간속에 깃든 영원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쇠락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비애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면서 다른 삶을 갈망하는 것은 약자의 버릇이다. 시인 구상은 영혼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무지의 장막이 걷히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가 하나의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고 표현했다. 기적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눈을 뜬 이에게 나타나는 현실이다. 일상 속에서 삶의 신비를 볼, 눈을 뜬 사람은 지긋지긋한 욕망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기 마련이다.




187쪽


행복을 위해 고통을 말끔히 제거하거나 외면하려 할 때 우리는 동시에 타자들의 고통에 무감하게 된다. 고통은 우리를 타자의 세계와 연결하는 든든한 줄이다.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타자들의 고통에 눈을 뜨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할 때 책임적 공동체가 형성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책임으로 수용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 곧 악이라고 한다.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236-237쪽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헤셸은 우리가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받는 타자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을 때 우리 삶은 확장되는 동시에 상승한다. 상승이란 욕망 주변을 맴돌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의 지평 속에서 세상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욕망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 부푼 욕망에는 타자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거리두기가 아닌 고립은 타자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적대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세상은 전쟁터로 바뀌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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