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을 연기하는 어른들
학교에 새 학생이 오면
아이보다 먼저 움직이는 건, 어쩌면 엄마들이다.
유독 혼자 있는 아이를 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고,
“어머, 우리 애랑 친해지면 좋겠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인사처럼 튀어나온다.
처음엔 그저 다정함인 줄 알았다.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 외톨이가 될까 봐 미리 손 내미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년쯤 지나고 보니
그 다정함 뒤에 아주 또렷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짝사냥꾼.
이들의 특징은 분명하다.
아이의 관계를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누군가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고,
내 아이의 단짝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못 견딘다.
그래서 움직인다.
빠르게, 그리고 집요하게.
처음엔 연락이 잦다.
“애들이 너무 잘 맞더라”
“우리 애가 ○○를 너무 좋아해”
“주말에 같이 볼까?”
이때까진 괜찮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관계가 편해지는 순간,
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온다.
아이 문제를 빌미로 어른의 영역까지 스며든다.
비교가 시작되고, 평가가 붙고,
관계의 끝엔 늘 미묘한 뒷말이 남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장면이 아이들 세계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더 자주 벌어진다는 게
조금은 이상하다.
동네에서, 모임에서, 학교 밖에서도
어른들이 단짝을 사냥한다.
“그 사람은 원래 나랑 잘 맞아.”
“우리는 생각이 비슷해.”
“너랑 내가 닮았잖아.”
상대의 성향이나 위치, 관계의 가치를
마치 자기 가치인 것처럼 끌어안고
서로를 단짝이라 명명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직관할 때면
이건 거의 코미디에 가깝다.
아이들은 변하고, 관계도 바뀌는데
어른들은 오히려
자기 확신을 증명해 줄 단짝을
더 필사적으로 찾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적당히 말 섞고,
적당히 웃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관계를 오래 가져가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라는 것도.
단짝은 사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데려오는 자리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단짝을 찾기 위해 분주한 어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용히 거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단짝사냥꾼이 아니라
단짝이 필요 없는 어른이
가장 편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