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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Dec 11. 2023

격조했습니다

일상 17


오랜만의 일기. 일기는 꾸준히 써야 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너무 편협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 가끔 그냥 하루의 나를, 평일의 나를, 주말의 나를 한 번쯤 돌아보고 싶을 때 적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 좋자고 쓴건데 이거 하나 못 썼다고 스트레스 받으면 쓰나.


술을 잔뜩 마시고 술병이 났었다. 무려 일주일을 꼬박 앓고 멍청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있기를 한 3일 한 것 같아.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푹 쉬지는 못했다. 애인과의 회포를 풀겠답시고 소주잔 넘기는 손을 꺾질 못 해서 헤롱헤롱 할 때까지 마셨다가, 추운 새벽 공기에 술체를 한 것 같아. 아주 좋은 시간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오래 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좋은 휴식을 취하지 못 할 것 같아 그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는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듯 싶다. 밤에 자꾸만 앓는 바람에 계속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을 괜히 신경쓰이게 했어.


그러고나서는 하루 정도 본가에 돌아갔다. 앞으로 머물 일이 더 늘어날테니 옷가지 몇 벌과 속옷, 양말 따위를 챙겨다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다 둘테니 말하라는 다정한 말 덕분에 아예 떠나있으려다 하루 정돈 들렀다. 고양이들은 내가 오래 사라져있으니 어리둥절 했을텐데, 오늘 하루 정도는 같이 꼭 끌어안고 자고 일어나야겠어. 할머니는 어딜 그렇게 오래 다녀오냐고 성화셨다. 이 나이에 바깥에 오래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니 걱정말라 말씀드리고,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안 하려다... 그냥 슬그머니 말했다. 사귀는 사람 집에 가있었다고. 밥도 같이 하고, 청소도 같이 하고, 빨래도 같이 하고, 그러고 계속 같이 있다 왔다고. 내게 맨날 결혼이란 말을 꺼냈다 면박과 함께 침묵을 지키곤 하셨던 것 때문인지 잠시 가만히 계시다 나즈막하게 말을 붙이셨다. 잘 만났음 좋겠다. 하고.


어수선한 청소를 끝내고 수요일에 M과 다녀왔던 지하상가에서 구매한 빌 에반스의 LP를 꺼내 LP보관장에 꽂아두었다. 계속 사고 싶었던 LP였는데, 회현 지하상가는 정말 천국이었지 뭐야! 다음번에 다시 들르려고 사진도 찍어왔다. 요새는 편하게 돌아다닐 LP샵을 찾고 싶어도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늘 인터넷으로만 주문했었는데, 이젠 실제로 가지고 있자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한참을 만졌다. 내게 있는 LP판은 생일 선물로 받았던 cigarette after sex의 두 앨범 뿐이었는데, 점점 가족을 하나씩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해. 


요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완성되지 않은 포트폴리오라도 냅다 이력서에 첨부해 넣어보고 있다. 물론 차근차근 하나씩 완성해 나아갈 생각이지만 돈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욕심을 내는 것이기도 해. 모든걸 늘 완성형으로 시작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완벽하게 끝내려고 하는 나의 병증이 너무 나를 가로막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조금 얼레벌레더라도 시도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주니어인데 완벽한 게 어디있어. 과거의 영화는 좀 접어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기획을 배울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 같아 걱정없다.


그 이후에는 계속 그의 집에 머물러 있다. 이 집은 조용하고, 큰 소리가 오고 가는 가족도 없고, 그는 내 개인 시간을 존중해주니 이렇게 노트북을 혼자서 두드리며 일기를 써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다고 본가에서 내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늘 방해받는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거든. 방에 누군가 계속 들어오는 것도 자꾸 내 생각의 흐름이 끊기고, 좀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근데 여기선 좀 자유로워져. 물론 항상 그와 함께 움직여야 하고, 밥도 같이 먹어야 하고, 타이밍을 맞춰야 하는 게 많지만 그것마저도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참 슬슬 독립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아빠는 요새 날 잘 보지 못해서 서운해하는 것 같지만, 어쩌겠어. 우리 둘 다 둥지를 털어낼 준비를 하게 된 거 아닐까 싶어 나는.


오늘 이후에는 다시 본가로 돌아가 할 일을 해야하긴 하지만, 오늘까지만 딱 자유를 누리려고. 이제 연말이 되면 그도 나도 더 바빠질 것이 뻔해서 약속을 하나 했다. 피곤할 때는 절대, 절대 서로 만나지 않기로. (이게 왜 이렇게 된건지는 나중 일기에 한 번 작성할까해.) 근데 오늘은 나한테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고 슬쩍 웃길래, 조금 오버해서 머물러 있게 되긴 했다. (아무리 덤덤하게 작성해도 나는 그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저녁에 돌아가고 나면 다다음주에나 얼굴을 볼 일이라 눈도장이나 잔뜩 찍고 갈 생각이다. 자, 오늘 일기는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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