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가의 사색17(작성: 2023.7.16.)
본 글은 심리상담가로서 상담하고 생활하며 느낀 바를 나누는 글이며, 1인칭 시점의 독백체의 글로 이루어집니다.
아울러 본 글에서 언급된 사람의 이름, 직업, 나이, 지역 등 배경정보는 각색되어 창작되었으며, 실제 인물이나 기관과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랜만에 박사학위 논문 진행을 해보고자 선행연구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 논문 진행했던 때 이후로 꽤 시간이 흐른 뒤다.
서울과 학교를 떠난 지 어느덧 3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동안 때때로 마무리하지 못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애쓴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도교수님들과 만나면서 이전 주제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논문 쓰기를 내려놓은 지 어느덧 1년이 훌쩍 넘게 흘렀다. 그 사이에 심리상담센터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다른 개인적인 사업도 준비하고 그랬다. 그러면서 지금은 박사 논문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앞에 당면한 일들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게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 배우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에게 한결같이 논문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내 머리 뒤편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는 걸 토로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위논문을 쓰기 위한 노력과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과연 왜? 무슨 심리였을까?
박사학위 논문을 머릿속에 떠올려 놓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심리로 이것을 그토록 미루고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 문득 내담자 P가 떠올랐다.
상담실에 찾아온 P는 게임을 할 때, 클리어하지 못할 것 같으면 게임을 꺼버리거나, 저장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아니면 그 판을 취소하고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자신이 게임에서 졌다는 것, 실패했다는 것을 보는 일은 없도록 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자기 일이 계획대로 시작되지 않거나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대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자기를 보면, 자신을 한심하고 작은 존재로 느꼈다. 또한, 그가 원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그것을 매우 불만족스러워했다.
상담하면서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실패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이 다른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어려워했다. 내가 상담에서 부족함이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하도록 시도할 때마다, 그는 그것을 직접 느껴보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과 현재 상황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 자신만의 여러 방법과 방식을 통해 진짜 자기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 일에 내담자 P가 떠오른 것은 회피와 직면, 수용이라는 변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심리상담 이론의 주요한 가정을 나 또한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맞닿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못 하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을 직면해서 인정하고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다른 것에 매달리는 회피 행동을 보였던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논문은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지.'
'난 논문과 같은 글쓰기는 그래도 잘하는 것 같아.'
'연구는 잘하는 것 같은데.'
'논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논문이 전부는 아니잖아.'
이와 비슷한 말들로 여태껏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고, 언제든 마음먹으면 학위논문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내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무기력하지 않은 나, 부족함이 없는 나, 자신감 넘치는 나를 남기려고 애썼다.
한편, 현실에서는 논문 주제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나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리고 '학위논문'을 입에 달고 살지만 행동하지 않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뭔가 막막하고, 논문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져 그 앞에 서면 나는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적나라하고 솔직한 내면을 마주하고 직면하기가 쉽지 않아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논문을 읽으니 확실히 읽는 속도가 예전보다 느리다. 그리고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주제 선정을 하는 것도 떠오르지 않고, 막막한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과연 논문을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스멀스멀 떠오를 때면, 무기력해지고 우울감마저 때때로 찾아온다.
그렇다고 이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은 아닌 듯싶다. 이런 내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수용할 때인듯하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아 두렵고 걱정된다는 것, 나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학위논문을 진행하는 것을 앞두고 걱정과 긴장과 불안이 많이 느껴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동안 애써 억누르고 회피해왔던 걱정하는 나, 불안해하는 나, 막막해하는 나, 긴장하는 나를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서, 이런 나와 함께 조금씩 앞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