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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07. 2023

나의 작은 냉장고 이야기

여유 있게 살고 싶다




구식 냉장고가 가져다준 평화


2021년 7월, 10년을 사용해 온 냉장고를 바꿨다. 쓰던 것은 오른쪽이 냉장실, 왼쪽이 냉동실이었던 큼직한 냉장고였다. 사들이는 것에 비해 냉장고가 큰데도 불구하고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신랑은 매번 "그거 어디 있어?"라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좀 찾아봐!"

"진짜 안 보이는데?"

큰 소리가 오고 가기 일쑤였다.


바꾼 냉장고는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아래 칸이 냉장실, 위 칸이 냉동실인 구식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500리터 가까이 되는 용량이다. 세 식구 먹거리를 저장하기에 딱 좋다. 특별한 기능이 없어서 그렇지 냉장, 냉동도 잘 된다. 무엇보다 식재료가 한눈에 다 보인다는 것이 가장 좋다. 더 이상 신랑의 "그거 어디 있어?"라는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냉장고 하나 바꿨을 뿐인데 평화로운 가족이 되었다.


집 근처 마트를 우리 집 냉장고처럼


한창 미니멀 라이프에 빠져있을 때이기도 했다. 미니멀 선배님들은 집 근처 마트를 우리 집 냉장고로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마트에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한데 왜 냉장고에 쟁여두냐고. 사놓고 썩어 들어가는 식재료가 얼마나 많겠냐고. 나도 그랬다. 뭐가 있는지도 몰라서 썩히고, 멀쩡히 있는 것을 또 샀다.


냉장고가 작아지니 확실히 장을 덜 보게 됐다. 5만 원어치씩 사서 쟁여두던 냉동 닭 가슴살도 끊었다. '채소 좀 많이 먹어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구비해두지 않는다. 양파, 당근만 들어간 카레도 얼마든지 맛있다. 과일은 한 번에 한 가지씩 사고 다 먹을 때까지 다른 것을 사지 않는다. 싸다고 쟁여두지도 않는다. 안사면 100% 할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렇게 맞춰가니 살아지더라. 업그레이드는 해도 다운그레이드는 못한다고? 냉장고만큼은 예외라고 해두자.


쟁여야 제맛?


"우리 집은 전쟁 나도 몇 달은 버틸 거야. 냉장고에 쟁여둔 게 얼마나 많은지. 호호호." 


한 번은 주부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신념이 크게(?) 흔들린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은 될까. 아무리 미니멀도 좋고, 신선한 식재료도 좋지만 조금은 쟁여둘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쟁일만한 게 있을까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 전쟁이 날 때는 나더라도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겠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뭐 사실 나름대로 쟁여둔 것들도 있긴 했고. 그 작은 냉장고 안에 쌀 10키로와 아이 주스가 몇 팩이나 들었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풍요 속의 빈곤


대대손손 모여 살던 시대는 지났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핵가족화가 되었다. 그에 비해 냉장고 용량은 자꾸만 커진다. 식재료가 다양해지고 먹을거리가 늘어난 것도 한몫할 것이다. 옛날에는 바나나가 그리 귀했다고 하니, 시대가 변해도 많이 변했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 각국의 식재료를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나도 당장 생각나는 식재료나 음식을 써보라고 하면 A4용지 몇 장은 거뜬히 쓸 수 있으니까.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된 만큼 금방 지겨워진다. 어제 먹었던 어묵볶음을 오늘 다시 먹기는 싫은 것처럼. 냉장고가 가득 차 있어도 먹을 게 없어 보인다. 또 시장을 본다. 그러다 같은 것을 또 사기도 한다. 마치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약간 모자란 듯이


냉장고 하나만 콕 집어서 얘기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작은 우리 집에도 정말 많은 물건이 들어 차있다.  냉장고 안에 양파가 있는 줄 모르고 또 산 건 말 그대로 몰라서 그랬다 치고, 멀쩡한 테이블이 하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싫증이 났다고 다른 것을 또 산 건 얄짤없이 낭비다. 냉장고가 어쩌고 할 때가 아니다. 이러다 주객이 전도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냉장고를 활용하는 것처럼 집도 널찍하게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시작은 냉장고였으니 그까짓 거 다른 것도 해보자. 뭐든지 꽉 채워놓는 것보다 약간은 모자란 듯 아쉽게 살아보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고, 비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집에 산다. 하루 섭취량에 맞게 음식을 섭취한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편해졌고 좋은 것도 많은데. 다만 무조건 큰 것이 더 좋은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생활습관과 환경에 맞는 소비를 하자는 말이다. 누구나 여유 있는 삶을 원한다. 그렇다면 바득바득 물건을 채워 넣기보다 하나씩 빈 공간을 만들어 보자. 그만큼 마음의 여유 또한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여유로운 삶의 시작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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