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예찬 Mar 30.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60

어린 딸이 얼마나 예뻤을까.

<Infanta Margarita in a White Dress, 1656>

- Diego Velazquez


딸이 20대 초반이다. 아기 때부터 스무 해 가까이 찍은 사진들이 폴더에 연도별로 한가득이다.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폴더를 열어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가는 아이의 얼굴이 신기하다. 사진이 없었더라면 세 살, 다섯 살, 여덟 살 무렵 딸의 생김새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


빈 미술사 박물관 초상화 방.

사진기가 없던 옛날엔 어땠을까. 장삼이사들이야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권력자들은 그림으로 자녀의 모습을 남겼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 초상화다. 아버지 필립 4세에게는 쉰 살이 넘도록 아들이 없어서 그대로 가면 마르가리타가 장래 여왕이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늘그막에 갑자기 아들을 낳는 바람에 공주의 팔자가 바뀌었다. 필립 4세는 딸을 오스트리아에 있는 자신의 사촌 동생 레오폴드 1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장래 시댁에게 그녀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자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에게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림을 통한 문안인사라고나 할까. 


(좌) <핑크 가운을 마르가리따, 3살>, (중) <흰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따, 5살>, (우)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따, 8살>.

몇 해 전 빈미술사 박물관에서 마르가리타 공주 초상화 세 점을 만났다. 공주가 세 살, 다섯 살, 여덟 살 때 그린 그림이다. 세 작품 모두에서 공주는 화려하고 섬세하게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여러 겹의 레이스와 주름의 질감이 돋보인다.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차림새나 아우라가 누가 봐도 왕족이나 귀족의 딸이다. 헐리우드 아역배우로 데뷔해도 될 정도로 얼굴도 깜찍하고 귀엽다.  


(좌) 15살 때 모습, (우) 필립 4세. 구글 다운로드.

위 세 작품에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이후에 그린 공주의 초상화들을 보면 합스부르크 왕가 특유의 유전적 폐해가 얼굴에 드러난다. 바로 부정교합(일명 주걱턱)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나눠서 통치했는데, 권력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문 내에서 결혼하는 근친혼을 지향했다. 그러다 보니 주걱턱 유전이 대를 거듭할수록 심화됐다. 어릴 때 그 귀엽던 공주도 나이를 먹으면서 '역변'을 피해갈 수 없었다. 10년도 안돼 얼굴이 많이 달라졌다. 멀리 시집가서 잘 살기나 했으면 좋았으련만 이 비운의 공주는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6년 만에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


필립 4세는 마흔 중반에 낳은 딸의 재롱을 보며 노년을 보냈을텐데 그녀가 결혼하기 한 해 전에 사망했다. 수백년 전 유럽 최고 권력자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였을테니 안타까운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어쨌든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문중에 감사드린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장래 아내(&며느리)의 성장과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했던 열정 덕분에 내가 이렇게 마르가리타 공주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c.f.)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삶을 모티브로 한 곡이라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