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도피자의 해외생활기 #.0
"딱 현지 그대로의 맛이야. 여기 똠양꿍 맛집이네."
25살 무렵. 사적인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가 태국 음식점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비행기에 오른 횟수가 나이보다 많은 금수저 태생이었다. 그의 입에서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는 달랐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현지의 맛'에 공감했다. 화제는 금방 살라댕 클럽과 카오산 로드 경험담으로 넘어갔다. 한국에서 청춘이란 이름으로 아파해야만 하는 20대는 다 나와 비슷하게 지지리 궁상처럼 줄 알았는데. 어린 내게 꽤나 소소한 충격과 소외감을 안겨 준 일이었다.
청파동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달동네. 밤 11시가 되어야 귀가하는 바쁜 부모님 밑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와 장애가 있는 누나를 늦은 시간까지 돌본 세월이 10년. 기숙사나 원룸은 욕심이었고, 편도 1시간 40분 거리를 통학했으며, 밤에는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마련하던 시절.
그런 주제에 감히 꿈이 하나 있었다. 채용 인원은 1년에 한 번, 딱 한 명. 그 바늘 구멍을 뚫기 위해선 학업도, 스펙관리도, 실기준비도 게을리 해선 안 됐다. 서류에 프로필 사진을 첨부해야 했기에 외모관리도 필수였다. 여기에 3개월 과정이 230만원 수준인 방송 아카데미를 다니기 위해선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런 내게 해외여행은 사치였다. 돈을 떠나서 평일 알바와 주말 알바를 모두 다 하는 내가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학원과 스터디 시간 때문에 3개월 간격으로 일을 그만두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제일 좋을 땐데 이참에 해외여행이나 다녀와"라고. 차마 "당장 내일부터 다시 학원 등록해서 못 가요"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항상 "해외여행 싫어해. 힘들고 돈만 쓰고 딱히 재밌지도 않던데?"라며 허세를 부렸다.
결국 28살 무렵에 현실과 타협했다. 누군가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격려했지만,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바쁜 삶을 살면서도, 직장인 친구들에게 '시간 많아 부럽다' 같은 소리를 듣는 것도 지쳤다. 무엇보다 태생부터 다른 경쟁자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작은 잡지사에 취직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세 잡지사에 취직하는 건 정말 쉬웠다. 면접부터 첫 출근까지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기서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온라인 경제 신문으로 이직했다. 아나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자란 타이틀을 달고 생활하는 것이 오랜 꿈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도 없었고, 내가 쓰는 기자는 기업을 협박해 광고비를 갈취하는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의감과 사명감이 아닌 열등감으로 가득 찬 선배 기자들 틈에서 이상을 쫓는 나는 그저 돈 되는 기사를 못 쓰는 무능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국장에게 이런 저런 술자리 호출을 받으며 접대부처럼 홍보팀 사람들을 상대했다. 국장이 술에 취해 내게 "얼굴도 반반하고, 술도 잘 마셔서 뽑았는데, 정말 그거 말곤 쓸 데가 없는 애다"라는 평가를 면전에서 내뱉었다. 그런 환경에서 적응을 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퇴사 후,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정말 마지막이다. 일을 하며 벌어 둔 돈도 있으니 이제 온전히 준비에 집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실패를 거듭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 덧 31살이었다. 준비에 매달리는 사이, 20대가 전부 지나가 있었다. 이루지 못할 꿈을 붙잡고 있느라 직장을 오래 다니지도 못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연애도 하지 못했다. 모아놓은 돈은 마지막까지 털어서 학원에 등록하느라 200만원 정도가 고작이었다.
현자타임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분명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지난 내 20대 시절을 되돌아 보니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니. 왜 지금까지 해외는 커녕 제주도 생각도 못 해보고 지냈던 거니.
이제 내 인생은 더 이상의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10년을 넘게 준비했던 모든 것도 다 안 됐고 더 이상 행복이니 열정이니 그런 것과도 연관이 없는 삶을 살 것 같았다. 하찮은 인생이어도 상관없지 않나. 그래서 나는 스스로 이 별 것 아닌 인생을 끝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모아둔 이 푼돈을 어디에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그때 몇 년 전, 태국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남들 다 해보고 살았던 걸 전부 미뤄둔 채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 내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살게 될 것을 뭐가 그렇게 바쁘고 힘드느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하고 살았을까.
다른 공간에 남겨진 것처럼 소외감을 주던 현지의 똠양꿍 맛이니, 카오산 로드니, 살라댕 클럽이니 하는 그런 것들. 혼자 그걸 공감하지 못해 빨대나 물어뜯고 있던 어린 나를 위해 방콕행 비행기를 결제했다.
방콕에 도착한 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다가, 기묘한 냄새에 이끌려 로컬 식당에 들어갔다. 그래. 이게 바로 나 혼자만 몰랐던, 아는 척 조차 할 수 없었던, 현지의 똠양꿍 냄새다. 한국에선 흔하게 맡을 수 없는 묘한 향의 빨간 국물. 그걸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미미(美味)를 외치며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냥, 한국에서 늘 먹던 그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깟 게 뭐라고. 뭐가 현지의 맛이야. 이딴 게 뭐라고 날 그렇게 무시했니.
그렇게 만감이 교차하는 스프를 싹 비운 후, 나는 또 다른 식당에서 '현지의 똠양꿍 맛'을 갈구했다. 그 맛에 집착하느라 다른 메뉴는 거의 먹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여행이었다.
가이드 북에 실린 유명 레스토랑부터, 숙소 근처 노점, 야시장, 주택가 사이 작은 노포까지. 온갖 종류의 똠양꿍을 향유했지만, 결국 한국에서 먹었던 그 맛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내 미각이 둔한 탓도 있지만, 들어간 재료로 추측해 보건데, 애초에 그 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차편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꿈을 포기했더라면, 그땐 어린 내게 이 아무것도 아닌 현지의 똠양꿍 맛을 볼 수 있게 해줬을까. 그랬다면, 30대의 내가 20대의 나를 불쌍히 여기는 날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
원룸에서 혼자 넷플릭스나 보던,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주말. 배달 어플에 새로 오픈한 동남아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를 회상하며 똠양꿍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현지의 맛 그대로네요’ 라고 리뷰를 적었다. 너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하루. 그 시절의 내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을 법한 작은 일상.
그때 깨달았다. 어쩌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찾을 수 없는 해외로 아예 떠나버리면. 이런 지옥같은 굴레와 과거를 모두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트럭에 치여 이세계에 떨어지는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겠지만, 최소한 비행기를 타고 다른 세계에서 적응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2019년.
해외 도피를 준비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