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그리고 잊을 사람들 #5. '자본주의 시대의 우리들'
D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시기에.
친할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 향년 94세. 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병사. 홀로 걷는 것도 힘드실 만큼 거동이 불편한 분이었기에,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 크게 놀라진 않았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같이 산 세월이 길다. 11년 전,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할아버지가 거처를 잃으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막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할아버지를 모시게 됐다. 졸지에 어머니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힘든 아내가, 나도 개인공간을 침범당한 불쌍한 손자가 됐다. 장애가 있는 누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고 힘들어 죽겠는데,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까지 더해져서, 나와 엄마는 우리도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지내야만 했다.
그때부터다. 할아버지를 모시도록 만든 친가 식구들을 미워한 것이. 그들은 굉장한 부자였고, 집에 남는 방도 넉넉히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우리 집은 매달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고, 남는 방이 없어 누군가의 공간을 내주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도 할아버지를 우리가 모실 이유가 없었다. 그것을 빌미로 다른 친척들에게 생활비라도 솔찬히 뜯어냈다면 또 모를까. 바보같았던 우리 부모님은 그런 적도 없으셨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언제나 돈 많은 큰집 식구들을 칭찬하셨다. 힘들게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아닌, 10년이 넘도록 먼저 찾아온 적도 없으신 큰어머니를. 취업준비로 고생하는 나보다는, 부모님 건물 1층에 카페를 차린 친척 형이 우선이었다. 오히려 매일같이 가난한 우리 가족을 보고 무능하다며 타박하셨다. 듣기 싫은 마음에 대놓고 이어폰을 끼던 일이 다반사. 마음 속으로 "살 만큼 살았으니 빨리 떠나시라"며 죽음을 기도한 적은 그 곱절로 많다.
그렇게 내 마음에 많은 스크래치를 남긴 그 사람도 결국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한 줌의 재가 됐다.
영정 사진 앞. 딱히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말년에 갑자기 요양병원에서 병마와 싸우셨기 때문에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된 상황이었으니. 미운 정이 더 많아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런 마음은 없었다.
썩 분주하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나는 무심결에 냉장고 속 탄산음료 하나를 꺼냈다. 공짜가 아닐 줄은 알았지만 대관비나 식사대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탄산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데 어머니가 오셔서 "너 그거 다 돈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딘가에 포함되어 선불로 결제한 것이 아니라 꺼내 먹은 만큼 나중에 후불로 결제하는 구조였다. 노파심에 슬쩍 가격표를 보니 편의점보다 비싼 값이 적혀 있었다.
고작 음료 하나 때문에 번쩍 정신이 들어 구석구석 뒤져보기 시작했다. 영정사진 액자부터, 사진을 모셔 두는 단상까지. 모든 것이 유료 서비스였다. 액자 조차도 비싼 돈을 낼 수록 더 좋은 것으로 바꿔주는 모양이다. 심지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상복조차 대여료가 있었다.
이별이 익숙하지 않았던 내겐, 짐작하기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행히 친가 친척들이 모두 부자였기에,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이 그렇게까지 초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올 것으로 예정된 손님에 비해 넓은 홀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렇게까지 큰 공간을 빌려야 할 이유조차 없었는데. 그저 '가시는 길 좋은 곳에서 보내드리고 싶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나도 명색이 마케터기에, 그걸 보고 마케팅이라고 한다면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세상 모든 불합리와 상술을 마케팅으로 희석시킨다면 얼마나 심한 난장판이 됐겠는가. (이미 반쯤 난장판이지만)
곰곰히 돌이켜 보니, 비슷한 경험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20대 중반, 웨딩홀에서 예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다.
당시 내 역할은 절차에 따라 신부를 대기실에서 식장까지 에스코트 하는 일이었다. 건너 듣기론, 약 20만원 가량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받을 수 있는 유료 서비스인 모양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예식이 에스코트를 필요로 했다. 그저 함께 걸어줄 뿐이거나, 당연히 필요한 안내 역할도 수익 모델로 만든 치밀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돈 벌어먹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구나, 라고.
뿐만 아니라, 장식용 꽃부터 식장 앞에 비치한 액자,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케이크 등. 예식장을 장식할 수록,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게 그만한 가치가 있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얼핏 보면 예뻐 보일 수 있는 액자여도 사실 아트박스에서 산 싸구려 플라스틱제 제품이며, 그저 거기에 준비된 사진을 꽂아주는 것만으로 30만원을 청구하는 서비스다. 그런 사진 몇 개, 사람들이 얼마나 본다고, 그걸 30만원이나 내고 추가할까. 조금이라도 멋지고 으리으리한 결혼식처럼 보이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엄밀히 말하면 서비스 비용이 아니라,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한 비용인 거겠지. 그래서 액자 장식이나 에스코트처럼 불필요한 요소를 계속 덧붙이며 1천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는 거겠지.
이미 결혼 한 친구에게 의견을 물으니 "식은 어차피 우리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답을 했다. 그렇긴 하다. 요즘 축의금 액수에 관해서도 말이 많은데, 결국 물가와 식대가 반영된 값을 축의해야 매너에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정도면 축의금이란 단어를 붙이는 게 맞나? 그냥 곗돈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런지. 그리고 사람들도 비싼 돈을 내는 것에 대해 아까워 하지 않는다. 낸 만큼 돌려 받을 것이란 암묵적 믿음이 있기에, 그 돈을 사실상 투자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마 예식장 측에서도 이걸 간파하지 않았을까 싶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더 좋은 가구나 가전제품을 산다는 선택지도 있을텐데. 내 돈이 아니라는 논리가 이성을 지배하는 덕분에 소비감각은 마비되고, 결혼식장은 그걸 이용해 몸집을 키운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서 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익이 많이 남아야 유지보수를 통해 깨끗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고, 직원들에게 봉급을 줄 수 있다. 이걸로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할 원동력을 만든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인가. 소기업 사장 자제만 되어도 비싼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병당 40만원 이상의 고가 양주를 마시고 노는 사회다. 반면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지탱하는 직원들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초봉 2,600만원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정말 이 서비스가 인건비, 판관비, 유지비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기준치보다 과도하게 책정된 금액이 분명하다. 인간의 경사와 애사 조차, 누군가의 장사로 이용되고 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현주소다.
2020년 여름, 물난리가 심했던 때가 떠오른다. 어느 지역 유골 안치장이 수해를 입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피해를 본 것은 1층과 지하에 모셔 둔 유골함이었다. 업체 관계자는 위로 올라갈 수록 비싸고 지하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말했다. 죽어서 안치되는 순간마저, 자연재해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 조차 돈이 결정하는 사회가 됐다는 느낌이 들어 씁쓸한 뉴스였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태어난 순간부터 생일, 결혼, 임종까지 모든 것의 가치가 가격으로 매겨지며, 거기에 따라 계급까지 나눠지는 사회라는 걸 생생각하면 다소 착잡할 때도 있다. 결혼이든 임종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이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일이거늘.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평등하고 동등한 부분조차 무게가 달라졌다. 이제 가난한 자의 슬픔은, 남들보다 조금 초라한 슬픔이 됐다.
다시 할아버지 얘기로 돌아가자면, 할아버지는 말년에 외로운 삶을 살다 가셨다.
자식들에게 남겨 둔 땅도, 집도, 건물도 없으셨다. 노령에 이사를 오신 탓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으셨으며, 홀로 화장실도 가기 힘들 만큼 거동이 불편하셨다. 덕분에 10년 이상 바깥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계셨지만 경제활동과는 연이 없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자식들이 준 용돈을 차곡차곡 통장에 모아 둔 1,300만원 가량의 돈이었다. 그는 밖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푼돈이 여전히 매우 큰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돈은 10년 넘게 할아버지를 보살핀 우리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약 1,000만원 가량의 빚이 있었고, 이를 다 갚고 나니 약 30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할아버지가 10년 넘게 쓰지도 않게 모아 둔 푼돈이, 못난 자식들의 대출이란 이름으로 은행에 상환되어, 초봉 4,600의 은행원 월급으로 환원됐다.
300만원은 요즘 시대에 한 달이면 다 쓰는 금액이다. 90년 넘게 산 할아버지의 인생이, 고작 1개월 만에 탕진될 수 있는 소액으로만 남은 사실이 약간 쓸쓸했다. 그렇게 싫었던 사람인데. 정작 곁을 떠나니 그제서야 뒤늦게 편을 들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도. 결국 돈으로 환산되고 대물림되며, 돈 문제라고 하면 모든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황금에 마취된 시대.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명절때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평소엔 작은 방에 홀로 계셨다. 때문에 바깥 세계 상황에 어두우셨다. 죽으면 땅에 묻히던 시대를 살아오셨기에, 본인 사후에 들어갈 세세한 금액까지 그리진 못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말년에 방 안에서 추억하시던 시대가 오히려 조금 부러워진다.
-fin.
[나를 잊은, 그리고 나를 잊을 사람들 시리즈]
만남, 사랑, 질투, 욕정... 어떤 관계든 반드시 근간이 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이를 잘 들여다 볼 줄 안다면, 인간관계는 그 어떤 책보다 좋은 성장촉진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내가 떠나보낸 가족, 친구, 동창, 연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지 정리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 경험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본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