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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논 Mar 22. 2024

C ~불안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

나를 잊은, 그리고 잊을 사람들 #4. '불안형 애착관계'

이상한 마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처음엔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점차 마음을 빼앗겼고, 어느 순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궁금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대 때 짧고 강렬하게 좋아했던 C에 대한 이야기다.


C는 못생겼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얼굴이 최악이면 몸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각종 남자 아이돌로 이미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진 내 눈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쁘게 봐줄 수 없는 수준의 레벨이었다. 그런 그에게 빠진 이유가 대체 뭐였을까.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사실 그렇게 못생긴 C에게 감히 내가 차였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분할 따름이다.


C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어디 감히 너 따위가 주변에서 예쁘단 소리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듣는 나 같은 애를 보고 안 좋아할 수 있겠니. 하여튼 예쁜 건 알아가지고. 하늘 모르고 치솟던 당시의 자존감이 덕분에 한 단계 더 상승했다. 그렇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몰려드는 것에 희열을 느끼던 흔한 관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딱히 아나운서를 준비해서는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았고, 특히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내 미소였다. 중학생 때 짝사랑하던 아이에게 웃는 게 안 예쁘단 소리를 들은 이후로 거울을 보며 '치아가 딱 8개만 보이는 이상적인 미소'를 줄곧 연습했는데, 그걸로 만들어진 예쁜 미소는 만난 사람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호평이었다. C도 그랬다. 그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호감이 간다며, 이상형에 가깝다고 말을 해줬다. 순한 인상에 예쁜 미소, 거기에 숨은 밝은 성격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처음엔 딱 그 정도였다. 그냥 내 팬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C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내가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내 진정한 모습을 꿰뚫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본적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이유는 ‘딱 거기까지의’ 칭찬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간 칭찬을 내게 수시로 건넸다. 강해 보이는 성격 속에 유약함을 띄고 있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아니면 사실은 딱히 착한 성격이 아니지만 진심으로 착한 사람을 동경하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했던가. 별안간 그의 칭찬은 그저 겉모습만 보고 성의 없게 전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나란 인간의 밑바닥까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사실 너무 어릴 때라 몰랐던 것뿐이지 워낙 알기 쉬운 인간이라 나와 조금만 시간을 같이 보내도 웬만한 사람들이 다 느끼는 부분이었더라)


그낭 어장에 양식하려던 물고기 한 마리에 불과했는데, 내 유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그것마저 감싸주는 듯한 마음이 들자, 다른 물고기를 모두 폐사시키고 그만을 위한 아쿠아리움을 만들었다. 사실 성적인 이끌림 같은 건 없었다. 그때도 나는 얼굴만 보고 사람을 좋아하는 '얼빠'였기에. 그래도 ‘마음이 동해서 만나는 연애’란 감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게 열렬했기에, 그에게 쉽게 마음을 허락했다. 사람들에게 보일 것을 염두하고 세팅한 내가 아닌, 나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해 주는 그 모습. 덕분에 책에서나 나오던 '진정한 의미의 자존감'을 찾을 수 있었던 느낌까지도 받았다. 


그런 그가 변했다. 처음에는 분명 ‘그런 부분마저 좋아’라고 말했던 부분에 대한 짜증이 늘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내 지나치게 의존적인 성향이 고쳐야 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분명 그런 부분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던 부분이다. 그렇다고 내가 C에게 심하게 의존을 했거나 물질적인 무언가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힘든 일이 있을 때 불평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C는 내게 ‘익숙’해졌다고 했다. 고작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의 익숙함은 내겐 그저 권태였을 뿐이다.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 처음에는 궁금한 것이 많아 질문 공세를 펼쳤던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연락에서든 만남에서든 내게 질문을 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이것은 '익숙'해진 감각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말하는 것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내가 말이 많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내 입을 쉴 틈 없이 놀리지 않으면, 우리 사이엔 고요한 적막마 흐를 뿐이었기에. 그런 C에게 나는 ‘마음이 식은 것 아니냐’며 자주 물었다. 그 대화가 3회 이상 지속되자 그는 짜증 섞인 말투로 ‘그만 좀 물어보라’라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식은 티를 내지 않으면 되잖아.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나는 C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적인 사랑을 기대했다. 그런  니즈를 충분히 수용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 그는 그랬다. 내가 굳이 배려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가 편한 쪽으로 행동해 주었기에, 원래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보답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C도 자신이 전한 사랑만큼 보답을 바라는,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건 이미 둘 사이가 끝난 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집착하는 사람이 됐다. 일하는 중에도 연락이 잘 되었던 그였고, 밤에는 연락이 더 잘 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패턴 상 답장이 1시간 이상 걸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반대로 그 역시 내게 1시간 이내의 답장을 요구했다. 본인도 연락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그랬던 사람의 연락이 2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 이후에 돌아온 연락도 아무런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 단답형. 아무리 내가 주로 대화를 이어가는 관계였다지만, 이렇게 대답하면 더 이상 답을 하지 말라는 뜻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차가운 대답. 참지 못하고 그에게 울분을 터트렸다. 왜 연락이 되지 않느냐고. 그는 말했다. “일하느라 바빠서.”  반대로 자신이 일하느라 바쁜데 2시간 이상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이해하고 기다려주지 못하냐며, 나는 정말 어린 사람이라 했다. 분노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은 채 상대방을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가스라이팅 하려고 드는 그 태도가 싫었다.


C는 급기야 만남마저 피하게 됐다. “미안한데 이번 주는 조금 피곤할 것 같아서”. 예전엔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찾아와 내가 끝날 때까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만큼 정열적이었다. 사실 C에게는 취미가 없었다. 집에 있어도 특별히 할 것 없이 그냥 동영상이나 영화를 시청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미장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그저 영화를 킬링타임으로 소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조금 피곤할 것 같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다.


이제 와서 쓰는 건데 나는 이런 거부받는 느낌이 너무나 싫었다. 엠패스.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이 그대로 전이되어, 상대방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에 쉽게 동화되거나, 또는 그렇게 믿는 타입. 나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상대방의 불안, 초조, 그리고 질림. 이런 것들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쉽게 전이되고, 상대방에게 금방 “너 지금 지루하지”라는 확신을 보낸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매 순간이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관계를 거부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C와 같이 있는 순간이 즐거웠을 리가 없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내가 C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그가 연락이 뜸해지기 전부터 시작이었다. 만난 지 1개월도 안 되었을 무렵부터. 그에게서 왠지 모를 매너리즘 같은 것을 느꼈다. 결코 1개월 만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의 말투 하나, 대답에 섞인 온점 하나, 연락 텀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


결국 C는 끝까지 ‘편안함’을 무기로 삼고, 내 집착을 ‘불편함’으로 표현했다. 현저하게 줄어든 관심과 연락 텀, 드라이해진 태도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짚어줄수록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했다.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그것이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진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런 말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았더라면 쉽사리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평일 저녁, C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도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 스터디 2개를 조절했다. 다음 날 2시간만 자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차가운 거절이 날아왔다. 일 끝나면 피곤한데 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넌 학생이라 시간이 넘치겠지만 나는 직장인이라 아냐. 일 끝나면 피곤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열심히 준비하는 거 잘 알잖아. 스터디 2개나 조절해야 되고, 그거 때문에 내일 알바 시간까지 바꿔야 했어. 근데 그런 나보다 퇴근 후에도 더 바빠? 정말이야?”


“직장인은 학생이 모르는 그런 게 있어. 네가 아직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래. 학생 때 스터디하고 학원 다니는 게, 그게 회사보다 힘들어? 넌 왜 그렇게 너만 생각하니. 이래서 학생은 만나면 안 된다니까.”


그의 모든 말엔 나를 위한 배려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내가 더 힘들다는 얘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가 이만한 리스크를 감내했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그런 부분도 그에겐 전달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 나이에 아직 대학생인 이유는 장기 휴학 후 회사에 취직해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데이트 시간 하루를 만들기 위해선 일주일 스케줄을 통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것도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그에겐 나에 관한 그런 정보들이 이젠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것이다. 그 연락 이후, 나는 그에게 메신저로 이별을 통보했다. 예상했던 대로 붙잡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메신저 통보. 그게 딱 그 가치에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애초에 내가 C를 선택한 이유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느낌 때문에 그와 만났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그에게서 날 좋아해 준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나야말로 그를 만날 이유를 잃는다. 건방지다. 그런 미성숙한 사람에게 자신 또한 사랑을 보답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심보 자체가. 사랑을 보답해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 정도는 본인이 좋아하기 전부터 먼저 판단했어야지. 반대로 그렇게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왜 자신을 만나는지 정도는 생각해 봤어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내가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었다. 


이후 얼핏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내가 집착이 너무 심해 이별하게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은 조금 모순이 있다. 집착은 애초에 누군가를 소유하기 위해 발동되는 것이거나, 자신이 받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그를 내 소유물이나 전유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외모가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이 커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내가 그에게 바란 건 그저 처음처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C에게 전한 집착은 소유욕이 아닌 불안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낙천적인 성격이라 일이나 학업에선 크게 불안을 느끼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런 내가 불안에 빠져있었다면… 과연 이 불안의 원인은 누구에게 먼저 있었을까.


불안형 애착 유형. 그렇다. 나는 사람에게 사랑받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애정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사랑받는다는 이 행복이, 절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며, C처럼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저 입이, 언제든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으로 변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C, 그 이전부터. 이미 익숙하게 겪은 감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사람이 되었다. 이 애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C보다 먼저 만났던 사람들이 늘 그랬듯, 내게 마음이 머물러 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기에.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둔감하지 못할까. 

왜 하필, 억지로 자아낸 웃음 뒤 숨은 파장까지 읽어내는 사람인 걸까.


요즘 MBTI만큼 애착유형 테스트가 많이 대중화되었다. 매번 검사할 때마다 나는 불안형 지수가 높게 나온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애정에 한해선 무한한 불안의 굴레에 빠져 곧 집착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나라고 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랑에 보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그가 원하는 형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적극적으로 보답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내게 맘을 먼저 떠나보냈던 것은 C였다. 상처는 마음이 먼저 식은 사람이 받는 게 아니다. 마음이 식은 사람을 억지로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이 받는 것이지.


이후 C와 같은 사람을 몇 차례 더 만났다. 그를 본보기 삼아, 그들에게는 최대한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게 매력이 없었던 탓인지, 그들의 열렬한 구애는 매번 그리 길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그들의 관심이 빠르게 식는 것이 느껴진다. 불안형인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파괴해 간다. 애초에 어느 쪽이든 파괴되는 모습을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해서인지. 이 불안정한 감각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생채기로 끝낼 수 있었을 상처를 더 깊숙이 후빈다. 그렇게 불안형 애착 유형에서 절대 탈출할 수 없는 우로보로스 같은 악순환이 반복된다. 나도 다르지 않다. C와 같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너무나 많았기에.


어쩌면 불안형 애착 유형은 사실 잘못된 것이 아닌, 사랑에 대한 이상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싶다. 내 높은 이상에 도달할 만큼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길 바라는 신념. 지금 관계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무기력함과 허탈감. 그리고 그것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에 관한 기대와 이상을 현실 수준으로 맞춰 놓는다면. 그러면 조금이라도 집착을 덜어놓을 수 있을까.


[나를 잊은, 그리고 나를 잊을 사람들 시리즈]

만남, 사랑, 질투, 욕정... 어떤 관계든 반드시 근간이 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이를 잘 들여다 볼 줄 안다면, 인간관계는 그 어떤 책보다 좋은 성장촉진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내가 떠나보낸 가족, 친구, 동창, 연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지 정리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 경험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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