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바라기 Feb 11. 2024

아빠와 일기장

아버지 힘내세요!

'12시 20분 기차역 도착.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설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 srt 열차를 타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향하며 문자를 보냈다.

'조심히 와라.'

짧은 답문 속에서 부모님의 설렘과 기다림을 느꼈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긴긴 겨울, 두 분만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적적하게 지내셨으니 명절이 퍽 기다려지셨을 게다.


"할머니, 할아버지!"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손주들이 덥석 안으며 인사하는데, 부모님의 얼굴에 반가움이 한가득이다.

시끌벅적 인사를 나누고, 한껏 솜씨 낸 엄마의 밥상에 연신 감탄하며 행복한 식사를 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봐."

여름내 길러 가을볕에 잘 말린 나물이며, 시래기를 넣어 푹 끓여낸 고등어조림을 부지런히 권하신다.

시골의 사계절을 차곡차곡 담아낸 엄마의 밥상에선 늘 햇살 냄새가 난다.

왠지 모르게 따스해지고 노곤해지는 느낌이랄까?


제법 많은 양의 설거지를 끝내고, 설음식 장만을 했다.

부지런한 엄마는 대부분 미리 준비해 두셨지만, 명절 음식의 하이라이트인 전 부치기는 남겨 두셨다.

꼬치 전 두 가지, 동태 전, 동그랑땡, 버섯 전을 아이들과 모여 앉아 끝도 없이 부쳐냈다.

온 집안에 기름냄새가 가득하고 왁자지껄한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아, 아버지! 어디 계시지?'


부리나케 안방으로 가보니 혼자 우두커니 장기판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뭐 하세요?"

"장기."

"혼자 무슨 재미로 장기를 두세요?"

"혼자라도 두어야지. 머리가 나빠져 자꾸 깜박깜박한다니까. 치매 올까 무서워."

예전 같지 않은 기억력 때문에 고민이 많으신 눈치다.

주기적으로 치매 검사도 하시고, 치매 예방에 좋다는 것들은 두루두루 찾아 하시지만 불안하신가 보다.

"어제 일도 잘 기억이 안 나."

"그럼, 일기를 써 보시는 건 어때요?"

"잠깐 써보기도 했는데, 아침 일도 잘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어. 짜증 나서 관뒀다."

"그럼 생각날 때마다 쓰시면 되죠. 꼭 밤에만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생각날 때마다 한두 줄씩 메모 형식으로 써보세요."

"글쎄."

미적거리시는 아버지를 보고 엄마가 한마디 거드신다.

"맨날 컴퓨터에다 다 적어놨다는데, 공책에도 적어놔야지. 컴퓨터 고장 나면 어쩌려고?"

아버지는 팔순의 연세에도 액셀로 가계부를 쓰고 계신다.

그 가계부 안에 간단한 메모를 곁들여 일기를 대신하고 계신 셈이다.

하지만 너무 간단하게 기록하다 보니 나중에 보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이 안 될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논농사를 남에게 맡겨 짓기 때문에 돈이 오고 간 내역 등을 잘 기록해 두어야 하나 보다.


일기 쓰는 이야기로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림일기로 시작해서 육 년 내내 일기를 썼다.

그동안 아빠는 예쁜 일기장을 끊임없이 사다 주셨다.

전주에서 문구점을 하는 친척 집을 방문하실 때마다귀여운 열쇠가 달려 있거나 화려한 표지를 한 일기장을 구해다 주셨다.

변변한 문구점 하나 없는 시골초등학교에서 내 일기장은 꽤나 부럼을 샀고, 일기 덕분에 상도 여러 번 받았다.

글 쓰는 게 좋아서였는지 예쁜 일기장이 좋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일기 쓰는 시간이 퍽 행복했다.

때론 현실과는 반대로 일기를 쓰거나, 엉뚱한 상상을 현실처럼 쓰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이곤 했지만 말이다.

사춘기를 거쳐 대학생이 되어서도 곧잘 일기를 쓰곤 했으니, 일기는 내게 오래된 친구였던 셈이다.

지금껏 글을 써보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 원동력은 유년시절의 일기 쓰기가 아니었을까?

어쨌건 아버지께서는 내게 일찌감치 좋은 친구 하나를 마련해 주신 셈이다.

그런 아버지께 지금은 내가 일기를 권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귀찮다고 하시면서도 딱 잘라 거절하지는 않으시는 걸 보니 밀어붙여도 될 것 같다.


이박삼일의 명절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께 보낼 공책을 마련했다.

여덟 권이 세트로 되어 있는 공책을 고르고 시골집으로 주문해 드렸다.

"아버지, 공책 주문했어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써보세요. 우리 아버지, 글도 잘 쓰시잖아요! 다음에 갈 때 검사할 거예요."

별말씀 없이 허허 웃으시는 걸 보니 싫지는 않으신 모양이다.

어린 시절 내 벗이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일기처럼, 여덟 권의 공책이 아버지의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햇살 냄새 가득한 엄마의 밥상처럼 아버지의 일기장도 따스한 이야기 가득했으면 더욱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기 낚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