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의 시 강독
시는 봉인된 언어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 속에 작가의 감각과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라, 그 단단하게 압축된 봉인을 조심스럽게 해제하는 과정이다.
한 행, 한 단어에 스며든 의미를 천천히 풀어내는 일.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처럼 밀도 있는 사고를 하려면, 나 역시 내 안에 봉인되어 있는 감각과 감정을 먼저 해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면, 어떻게 시인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는 독서를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늘 조급하다. 더 많은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쌓여가는 독서 목록을 보면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그 조급함이 오히려 밀도 있는 독서를 방해한다는 것을 안다.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기보다는,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러니 시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시는 속도가 아니라 깊이를 요구하니까.
시는 빨리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언젠가는 강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강독이란 결국 내가 글을 어떻게 읽고 느꼈는지를 나누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요약이나 분석이 아니라, 텍스트와 나 사이에서 일어난 밀도 있는 만남을 증언하는 것이다.
한 문장이 내게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어떤 구절이 내 안의 어떤 기억을 깨웠는지를 나누는 것.
그러려면 시를 대하듯 한 문장, 한 단어에 머무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능력은 결국 나 자신의 감각이 얼마나 깨어있는가에 달려 있다.
서점에 가면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갖지 못한 시선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밀도 있게 살아낸 순간들이 글이 되어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전쟁터에서, 어떤 이는 사랑의 한가운데서, 어떤 이는 평범한 일상의 틈에서 자신만의 밀도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의 인생도 시처럼 밀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삶의 순간순간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감탄할 줄 아는 것.
앙드레 지드는 일상의 평범한 사물에서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수성에 대해 말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있던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신호등 앞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심지어 사람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휴대폰을 본다.
신호등을 그냥 보지 않는다.
하늘을 보지 않는다.
길가의 나무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 속에 늘 존재하는 작은 경이들을 지나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휴대폰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조차 이제는 하나의 능력이 되어버렸다.
이 능력은 결국 여유에서 나온다.
멈출 수 있는 여유, 비어 있을 수 있는 여유.
그래서 가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박웅현 선생님의 『여덟 단어』처럼 사는 것, 삶의 순간들을 음미하며 밀도 있게 사는 것은 결국 돈이 없다면 사치가 아닐까?
생계에 쫓기는 사람에게 일상의 경이를 발견하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도 좋은 것을 찾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밀도 있게 산다는 것은 경제적 여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익숙한 것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더 밀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라는 것은 때로 끔찍한 질병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냥 살면 편할 텐데, 자꾸 의미를 찾으려 하고, 깊이를 요구하고, 밀도를 갈망한다.
평범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더 바라보게 만드는 것.
평범한 하루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생각이고, 그것이 시이며, 그것이 결국 삶이 아닐까.
봉인을 해제한다는 것은 결국 깨어 있다는 것이다.
내 감각에, 내 감정에, 내 삶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