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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27. 2024

간병일기 45

벼랑

벼랑


점점 벼랑으로 내 몰린 느낌이다. 남편의 파수꾼이 되어줄 수 없는 상황. 파수꾼도 없이 그는 막다른 벼랑끝에 홀로 서 있다. 극도의 긴장감. 인생 다 그런 거라고 체념을 하자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받아들이자고 해도,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냥 모든 목숨의 끈을 끊어버리고 함께 사라지고 싶다. 


그래, 언젠가는 가게 될 길이다. 안다고, 이해한다고, 느낀다고 해서 머리가 마음으로 마음이 머리로 저절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길은 다르고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으니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그저 오는 것은 오는 대로 가는 것은 가는 대로 머무르는 것은 머무르는 대로 그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형님 내외와 조카가 다녀갔다. 형님 내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남편은 “왜 따님을 두고 가시냐?”고 딸아이를 조카딸로 착각하고 데려가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아찔했다. 장난으로 웃어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미 남편의 머리에서는 남편 식의 기억은 전도되고 전복되고 오해되고 오인되고 있는 것이다. 식탁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던 때도 한참 지났다. 나보고 “당신 누구냐?”고 조만간 물어올 것이고 자신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지 못할 때도 올 것이다.

 

시간이라는 악마에 모든 걸 맡긴 채, 넋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운명이라는 말을,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쓰는 게 맞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식탁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다. 남편은 한겨레신문의 ‘왜냐하면’을 읽고 또 읽는다. 읽고 잊어버렸는지 눈이 향하는 자리는 신문을 읽겠다고 들었던 처음 그 자리이다. 나는 곁눈질해 가며 그 앞에서 몇 자 적고 있다. 무얼 적느냐고 묻지 않아서 안심이다.(2011년 1월 1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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