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쏟아 붓는다. 아니,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리 꽂는다. 으스러진 비린 몸에서 튀긴 핏물로 지상이 아수라장이다. 산사태가 일어났다. 강남 우면산 아파트와 춘천 민박집을 덮쳤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민박집에서 자다가 무너진 흙더미에 그대로 파묻힌 사람 중에는 봉사활동을 하러 갔던 인하대생들도 있다. 그들은 나와 20여년 차가 난 후배들이다.
출신 학교가 같아서 후배라고 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타인일 뿐이다. 허나 그들과 시차를 두고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다른 죽음보다 더욱 마음이 쓰인다. 그것은 살아서 같은 풍경에 스민 생의 기운을 나누다가 그들의 죽음으로 내 삶의 어느 구석에 깃들고 있던 그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빈자리를 만든다. 봉사활동을 떠났던 터라 그들의 선한 마음이 주는 울림도 크다. 한창 나이의 아까운 젊음들의 비명횡사.
죽음에는 기다리는 죽음과 느닷없이 닥친 죽음이 있다. 기다리는 죽음은 죽음의 발자국을 들으며 고문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을 예행연습할 기회는 주어진다. 하지만 느닷없이 닥친 죽음에는 그 무엇도 시도할 틈이 없다. 삶이 어느 순간 토막 쳐져 뭉툭 잘려나간다. 증발이 된 존재의 삶, 곧 죽음이다. 막무가내로 침입해 숨통을 조여온 죽음을 맛보며 그들은 마지막 순간 무엇을 보았을까?
잠자다가 밀려온 흙더미에 그대로 묻혀 당했을 고통과 두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온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라더니 대문을 나서지 않아도 집안까지 저승사자가 찾아든다. 모든 생명은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되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부당하고 끔찍해 보인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했던가. 이토록 가혹하고 참혹한 죽음에서는 평등이란 단어조차 꺼낼 수 없게 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사. 슬픔이 꾸역꾸역 밀려들며 가슴 한쪽을 아리게 한다. 남은 자는 존재의 증발, 그 믿기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이다.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저주한들 무슨 소용이랴. 다만, 비통하고 원통할 뿐이리.
이런 불행한 사고 소식을 접해서 그런지 자꾸 당신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딸아이가 잠자리에 누워서 자기는 아직도 아빠가 병원에 있는 것 같단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전쟁터에서도 아이들은 자란다는 그 말을 믿고 싶다. 자신의 피붙이를 잃은 슬픔에도 아이들은 비바람을 이겨내는 들풀처럼 굳세게 자라리라는 것을.
단 한 번 태어난 것처럼 단 한 번 맞이하는 죽음. 태어난 것에는 연연해하지 않지만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죽음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지 못한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누구나 처음 경험하게 되는 길이다. 거역할 수 없는 길, 그저 따를 수밖에 없어 그저 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보지 못한 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나기에, 떠나기도 힘들고 보내기도 힘들다.
여기 남아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쓸쓸하고 생경하고 갑갑하다. 비현실적인 죽음을 현실로 맞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뇌리에 죽은 자를 산 자로 각인시켜 그를 살아가도록 한다. 살아있다고 믿는다. 죽음을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실감을 덜어내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니. 나 역시 당신이 생을 마쳤다기보다는 무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요즘 당신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읽고 있다. 읽다보면 어느 순간 독서의 진도에 진척이 없을 때가 있다. 읽는 부분을 되풀이 읽으며 어느 문장에 갇혀 빠져나올 수가 없다. 무릎에 얹은 책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당신의 실체가 너무 생생하게 꿈틀거린다. 웃고 걷고 먹고 아프고 하는 여러 장면이 이어지면서 나는 그런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잠은 천리마를 타고 이내 달아나고 없다. 당신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어느 강인지 바다인지에서 우뚝 선다. 당신이 내게로 올 수 있는 지점은 딱 거기까지인 모양이다. 당신의 걸음이 멈춘 곳에서 당신은 서서히 제로가 된다. 당신의 실체는 허공으로 흩어진 것일까, 숨어버린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당신은 그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다.
아들 녀석 재우려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면 당신은 낮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방문한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이 선연하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은 당신은 이내 대리석처럼 파리한 시신이 되고 만다. 하지만 당신은 다시 눈을 위로 치켜뜬다. 발작이 오려나 보다. 당신의 뒤틀린 몸을 보는 것이 괴롭다. 밤이 빚어내는 어둠의 형상은 당신의 처연한 몸뚱아리로 다가와 내 얼굴위로 눈물자국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