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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Nov 04. 2024

간병일기 후 05

주민 센터에 제적등본과 가족관계 증명서 등 필요한 서류를 떼러 갔다가 당신 이름 옆에 찍힌 ‘사망’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망(死亡)’이라는 단어. ‘사망.’, 죽고 망했다. 단어 하나가 사람의 가슴을 이렇게 후벼 팔 줄이야.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이 무지막지한 단어에 살의가 느껴졌고 살의를 느꼈다. ‘죽음’이니 ‘별세’니 ‘타계’니 하는 단어는 공적 문서에서 죽은 사람을 적시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일까. 죽고 망했다는 ‘사망’의 단어로 굳이 죽은 자를 분리해야하는가. 사망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찢긴 나는 텅 빈 공간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좌절감을 맛보았다.


톰 히크먼의『사용설명서 [죽음]』을 재작년에 읽다가 완독하지 못했다. 이 책의 제목은 ‘사망’이 아니라 ‘죽음’이다. 세상을 떠나는 일을 이르는 여러 용어 중 관공서에서는 왜 굳이 '사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 죽음은 생물학적인 마침표 외에도 정신과 영혼 그에 부수되는 많은 의식과 절차를 아우르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 단어는 ‘사망’이라는 단어처럼 죽음 자체를 삶에서 변방으로 밀어붙이며 경시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일종의 평정심 정도는 유지하게 한다.


하지만 사망이란 단어는 한 존재의 종결을 주검에 한정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를 더 아득하게 만들고, 떠난 자를 다른 세계의 사람임을 더 명확하게 확인시켜 준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들 때는 ‘죽음’을 ‘사망’과 같은 의미로, 아무 의미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많은 서류에 적힌 당신 이름 옆의 사망이라는 단어를 목격하고는 책 제목을 '죽음 사용 설명서'가 아니라 ‘사망 사용 설명서’라고 읽어보니 무지 거칠고 무자비하게 다가온다.


삶이란 것이 결국 죽음을 향한 전진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때가 있었다. 죽어가는 삶이라니! 삶에 죽도록 회의를 느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화돼 버린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허망한 것인가.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 세계관에서는 목적지가 죽음으로만 여겨졌기에 의욕을 상실하고 빠른 죽음을 동경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것은 필멸할 운명의 과잉된 자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당신은 내게 자꾸 소감을 묻곤 했다. 작가의 박학다식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 민족마다 상상 그 이상의 차이를 보여서 새롭다고 말했던가. 한 편의 시 같은 면이 있는, 유명한 작가의 마지막 말은 이제 믿지 않게 되었다. 설마 죽어가면서 그 말들을 했을까. 임종에 이르게 되면 기력이 없어 말을 할 수 없고 뇌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의 당신도 그랬다. 숨을 고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런데 무슨 마지막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떠날 때는 그저 떠나는 것에 집중하면 될 터이다.


오늘은 책의 다음 구절, “최소한 생물학적으로만 본다 해도 분명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은 한때 살아 있었던 이들과 앞으로 태어날 이들을 잇는 다리라는 사실을.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죽어가는 이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니.” 라는 부분이 좋았다. 당신과 내가 여전히 보이지 않은 그 무엇으로 이어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당신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부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떠나갔다. 근 1년여의 세월을. 시간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의 향방을 모르고 떠나는 것은 행일까? 불행일까? 지상에서 당신의 마지막 1년은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비워가는 시간처럼 여겨졌다. 이 땅에 살아간 흔적을 지워야 저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기나 하는 것처럼. 당신 생의 마지막 날들을 그렇게 시간에 먹히면서 당신을 떠나갔다. 하지만 떠났음에도 당신의 존재는 저 가족공원 납골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에 있고 아니, 내 마음속에 있기에 집안 곳곳에 남은 당신의 흔적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내 감각을 두드린다. 사망이 아니라 죽음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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