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이 둘만을 집에 놓고 오기가 뭐해서 어제 당신에게 못 온다고 말해 놓고선 결국 당신을 보러 왔다. 언니에게 부탁해서 자가용을 타고 아들 녀석을 데리고 왔다. 딸은 친구랑 집근처 수영장에 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어서 당신 앞에서 담담해지려고 했다. 내 눈물샘은 내 의지를 반하지 않는다.
아이 앞에서는 울보 엄마로 보이지 말아야지. 엄마가 울면 아이도 훌쩍일 것이니. 혼자가 아니라, 언니와 아들 녀석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침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니, 당신 역시 당신 주변에 널린 여느 죽음 중 하나로 여겨졌다. 조금은 객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만 집중했던 정신이 분산되니 눈물마의 출로가 막힌 모양이다.
누나가 수영장을 간다고 해서 녀석도 수영장을 가겠거니 했는데 녀석은 누나가 아니라 엄마를 따라 나섰다. 혼자 집에 두고 올 수가 없어 이모 자가용을 태우면서 녀석에게 딱히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도 어딜 가냐고 묻지 않는다. 딱히 어디를 가든 엄마와 이모랑 함께 있으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겁이 많고 예민한 아이다. ‘아빠한테 간다.’는 것은 어른식의 표현이고 아이로서는 그 말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른들이 그렇게 표현하니 아빠의 납골함이 아빠인 것이고 엄마가 가고 있으니 따라가는 것이지, 혼자 발걸음을 해서 올 그런 나이는 아니기 때문에.
아빠가 이미 아닌 아빠의 유해를 모신 납골함을 보러 가면서 마치 아빠가 살아있기나 하는 것처럼 말을 하면 섬뜩하고 무섭지 않을까. 아이의 나이에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직 생경하지만 이미 아이는 아빠를 상실했다. 없는 아빠를 보러가는 엄마에게 가지 말자고 할까봐, 실은 아이에게 아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족공원 근처에 이르자 녀석이 오늘 행선지를 알아챈다.
엄마와 이모 사이에서 녀석은 당신에게 묵념을 한다. 아이는 의젓하다. 이제는 아빠라고 할 수도 없는 항아리 단지의 당신 이름 석 자를 보고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 어른들을 기다리며 아이는 묵묵히 있다가 지루해진 모양이다. 이내 바깥 풍경에 눈을 돌린다. 인공연못 주위로 잠자리 서너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당신보다 아이의 마음을 챙겨야했기에 일찍 당신에게서 떠났다. 아이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물속의 올챙이며 죽은 잠자리 수채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만월당의 기념식수의 쇠 버팀대에 앉은 잠자리를 그 작은 키로 잡아보겠다고 팔짝팔짝 뛴다. 잠자리는 쉬 잡히지 않는다. 잠자리도 지지 않고 그곳이 제 거처인 듯 아이를 약 올리며 자꾸만 높은 데를 골라 앉는다. 아이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미련을 못 버리고 잠자리와 씨름을 한다.
잠자리야, 잡히지 말아라. 잠자리야, 멀리 멀리 달아나라. 잡혀서 날개가 찢기면 결국 죽을 목숨이잖니? 내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잠자리. 만월당의 기념식수에 앉은 잠자리의 목숨은 안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