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하면서도 끝내 품에 안은 아이
김유정 〈애기〉(김유정기념사업회)
죽어라, 하면서도 끝내 품에 안은 아이
김유정의 해학은 독자의 공감을 사고, 비루하고 천박한 것까지 보듬어 웃어넘기게 하는 재주가 있다. 〈동백꽃〉에서 패드립에 가까운 점순이의 망언이나 〈봄봄〉에서 장인될 어른의 사타구니를 붙잡고 늘어지는 머슴의 난데없는 행동, 〈솥〉에서 제 마누라 속곳까지 들병이에게 흔들어 보이며 술을 얻어 마시는 사내까지, 다 저속하고 망측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김유정의 손을 거치면 그것들이 웃음으로 바뀌고, 웃음 속에서 인간의 처연함과 가난의 무게가 드러난다.
그의 세계에서 비루함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사람 사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우습고 짠한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체면, 욕심, 가난, 애틋함을 김유정은 가볍게 비틀면서도 결코 그 인물들을 밉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은 살아보려는 몸부림, 먹고살기 위한 버둥거림으로 읽힌다. 그래서 우리는 웃으면서도 그 웃음 끝에 남는 서늘한 비애를 외면할 수 없다. 그의 해학은 조롱이 아니라 연민이고, 위안이며, 낮은 것을 낮다고 멸시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 편의 시선이다.
〈애기〉 역시 그렇다. 딸을 키워 부자 사위를 얻어 한몫 잡아보려 했던 아버지가, 정작 딸이 전기회사 다니는 남자와 배가 맞아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아이를 갖자, 그 배가 불러오는 모습을 남의 눈에 띄게 둘 수 없어 “땅 50석을 주겠다.”는 미끼를 던지고 신체만 건장하면 된다는 조건 하나로 서둘러 시집을 보내버린다.
이 행동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탓하기도 어렵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체면을 지키려는 속됨과 비루함, 딸을 통해 한몫 챙겨보려던 얄팍한 욕심,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여 만들어낸 선택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체면을 위해 딸을 급히 치워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체면이라는 것조차 작은 욕망과 비루한 마음이 빚어낸 현실적 계산이었다.
더욱이 뱃속의 아이를 떼려고 갖은 낙태약을 들이먹이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보는 장면이 아무리 노골적이어도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을 무조건 비난하기도 어렵다. 죄 없는 뱃속의 아이가 가련한 건 사실이지만, 또 그 아이의 처지가 한없이 불쌍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이해 안 될 것도, 손가락질만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 지점에 김유정의 해학이 있다. 비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편들 수도 없는 인간사의 애매한 감정. 그 모호함 속에서 독자는 웃으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이해하게 된다. 없는 살림에서 땅 50석이 온다는 말에 덥석 무는 서른 넘은 홀아비 필수와 그의 아버지의 속내도 다 거기서 거기다. 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적당히 속고 적당히 속여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몸으로 보여준다.
특히 필수 역시 남자라 여자의 외모에 은근히 기대를 품었지만, 막상 신부될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낭패를 금치 못하는 장면은 김유정 특유의 해학이 번뜩이는 대목이다.
“누가 깔고 올라앉았었는지 모릅니다. 얼굴은 멋없이 넓적합니다. 디룩디룩한 살덩이, 필시 숟가락이 넘어 커서겠지요. 쭉 째진 그 입술. 떡을 처도 두말은 칠 법한 그 웅덩판, 왜 이리 떡 버러졌을까요.”
이 장면은 단순히 못생긴 신부를 비웃는 대목이 아니다. 자신도 가난하고 망가진 삶을 살면서 막연히 ‘예쁜 아내’를 바라는 필수의 터무니없는 기대,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의 우스움과 초라함, 그리고 그 초라함마저 미워할 수 없이 인간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뒤엉켜 있다. 그래서 그 웃음 뒤에 가난한 인물들의 삶이 가진 어설픔, 어리석음, 욕망, 체념을 마주하게 된다.
어지간히도 못생긴 이 얼굴이 혼례를 치르고 시집으로 들어간다. 첫날밤을 치를 때도 여자의 배는 이미 딴딴하게 부풀어 올라 누가 봐도 병든 배처럼 여겨지지만, ‘본시 땅 때문에 얼르고 붙은 결혼’이라 처녀라야 맛이냐 하며 그 배를 오히려 복성스럽게 여기고 만다. 그만큼 이 결혼의 목적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그런 배를 하고 시집에 들어오니 시부모도 불평 한마디 없다. 처음부터 며느리에게 기대한 것도, 바란 것도 없고 그저 땅 오십 석이 오리라는 생각 하나로 마음속 불만을 꾹 누르며 비위를 맞출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는 아래 말 한마디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체 색씨니만치 이놈 것 좀 뱃다가 저놈 것 좀 뱃다가 하기가 그리 욕은 아닙니다. 저만 똑똑해서 자식이나 잘 기르면 그만 아닙니까. 물론 그 속이 좀 다르니까 이런 생각도 하지만요.”
이 한마디에는 혈육이나 도덕보다 당장의 살림과 삶이 먼저인 그 시대 농촌의 정서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며느리의 배 속 아이가 누구의 씨든 상관없고, 잘 키워 살림살이 보탬만 된다면 그만이라는 무심하고도 치졸한 생존본능, 그것이 김유정 작품이 지닌 해학의 본모습이다.
처가에서 올 거라는 땅 50석은 끝내 오지 않고, 두어 달 뒤 아이는 태어난다. 그러나 그 아이는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다. 뱃속에서부터 “죽어라, 죽어라” 하는 저주의 말을 들으며 자라온 아이는 그 모든 악의에도 살아서 세상에 나왔지만, 태어난 순간조차 따스한 품을 얻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잠시나마 죽여버릴까 하는 잔혹한 마음을 품었고, 엄마라고 해서 그 아이가 귀여운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부정을 드러내는 존재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버린다는 생각, 잔인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자식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날이 뻔히 보이는 가난의 무게 앞에서의 선택, 어느 쪽도 옳지 않고, 어느 쪽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은 늘 그렇듯 옳고 쉬운 길을 고르게 내주지 않는다. 살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부부는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필수는 부유한 다방골 기생촌 어느 대문 앞에 아이를 내려두고 돌아선다. 그러나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 울음이 들려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얼어 죽을 것이다. 필수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갖다 버릴 거라면 차라리 봄이 오고 난 뒤여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아이를 다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봄이 오면 정말 필수는 아이를 다시 데리고 나갈까. 아내에게도 처음에는 기대가 컸지만 살다 보니 그 기대가 서툰 정으로 바뀌었듯, 아이에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얄미운 얼굴이 버릴 수 없는 얼굴이 되고, 짐이라고만 여겼던 작은 존재가 곁에 있어야 할 이유로 바뀌는 일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흔한 일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지면 주어진 대로 꾸역꾸역 붙들고 살아내는 삶처럼 말이다.
김유정의 세계에서 삶은 늘 그렇게 어정쩡하고, 사랑은 그렇게 늦게 찾아오며, 사람은 그렇게 느리게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이야기는 끝났지만 필수의 선택은 끝나지 않는다. 그가 봄에 아이를 버릴지, 아니면 품에 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필수 본인조차 모를 것이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날 밤 얼어 죽을 뻔했던 작은 생명을 필수의 두 팔이 끝내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애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따뜻한 울림이다. 버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채 품에 안은 가난하고 서툰 마음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