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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66

그 밤, 침묵이 사랑을 대신했다

by 인상파

신라 향가 <처용가>


그 밤, 침묵이 사랑을 대신했다


<처용가>는 내게 사랑의 타락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육체적 사랑이 얼마나 느슨하고 가벼운 옷처럼 벗겨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 유일한 백제 가요인 <정읍사>의 화자가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휩싸여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처용은 그보다 훨씬 대담하고 담담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두 작품을 나란히 두고 보았을 때, 처용이 보여준 태도에 점수를 후하게 매기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랑을 잃고도 무너지지 않는 그 처용의 절제와 미소를 귀하게 여겼지만 나 또한 사랑의 무너짐을 건너온 뒤에 다시 이 작품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다른 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처용이 아니라 아내의 자리에 서서 이 작품을 읽고 있었다. 만약 그녀도 그 남자에게 마음을 뒀다면? 그 밤이 단순한 실수나 강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던 열망의 끝이었다면?


그렇다면 처용이 그토록 절제의 미학을 드러내며 체념의 미소를 머금었던 이유는, 어쩌면 사랑이 이미 흘러가 버린 자리에서 더는 붙들 것도, 단죄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저들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면 그저 지나가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작품은 성적 문란을 비판하는 듯 보이면서도, 정작 그 안에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어떤 은밀한 너그러움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불륜의 노래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란 언제나 붙잡히지 않고, 마음은 떠날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래서 조선의 견고한 가부장제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신라라는 시대는 이미 남녀의 관계 사이에 스며 있는 틈, 그 느슨한 여유 속에서 성적 해방과 인간적 탄력을 맛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죄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미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욕망과 용서, 체념과 이해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일 뿐이다.


그 밤 이후, 그 부부는 어떤 시간을 함께 건너갔을까.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 춤은 웃음이었을까, 아니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몸의 언어로 대신한 눈물 없는 울음이었을까. 그 이후 아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남편 곁에 누울 수 있었을까. 아니면 가장 먼 베개 끝으로 몸을 피하며, 주눅이 들어 말도 못하고 벽을 쌓아갔을까.


사람들은 흔히 한 번의 배신이 사랑을 무너뜨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랑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 단 한 번의 발각이 아니라, 그 이후 반복되는 침묵과 미세한 단절들, 서로를 외면하는 눈빛, 끝내 말하지 않은 상처들이다. 이미 사랑은 그전부터 서서히 숨이 끊어지고 있었을 것이니, 이제 다시 살려낸다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개의 부부가 그렇듯 한때 서로를 사랑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고 결심하고, 또 흔들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부서졌다가 다시 붙고,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며, 그 과정 전체를 사랑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을 품으며 살고, 또 다른 이는 그런 사람을 품은 채 살아간다. 오는 만큼 가지 않고, 준 만큼 돌아오지 않는 균열과 불균형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살아내고 있다. 떠나는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며, 떠나보내는 상처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 밤, 처용과 아내 사이에 흘렀을 침묵은,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침묵은 아니었을까. 이미 둘 사이의 사랑이 오래전에 끝났음을 시인하는 침묵.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작품을 읽은 것이 아니라, 어느새 작품이 나를 읽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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